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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Dec 19. 2021

(2) 엄마 이제 조금 쉬어도 될까

이혼 후 이야기 #. 62





예전에 뉴스에서 직장인들의 번아웃에 대한 기사를 본 것이 생각났다.

인터넷에

[번아웃 증후군 뜻]을 검색했다.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이야...

어떤 건 맞고 어떤 건 안 맞네.





책을 열면

신문을 펼치면

강의를 들으려고 노트북을 켜면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은 증상이 계속되었다.



새벽 4시에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면

나만 일어난 이 시간이 뿌듯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운동복을 주섬주섬 입는데

눈물이 났다.



난 괜찮아

난 괜찮아


계속 중얼거리며

소매로 눈물을 훔치면서

꾸역꾸역 운동복을 몸에 입혔다.



빨리 뛰기 위해 얇게 입은 운동복이

쇠로 만든 갑옷처럼

무겁게 몸을 짓눌렀다.



모자를 쓰고

양치를 하고

장갑을 끼고

이어폰을 꽂으면서

훌쩍훌쩍 울었다.




나 혼자서

컴컴한 그 길을

새벽 4시 20분에 외롭게 달리는 것이


사실은

싫었다.




발가벗고 있는 것처럼 몸이 떨리는

새벽의 찬 공기가 무섭고 싫었다.



망설이지 말라고

속도를 늦추지 말라고

계속 뛰어나가라고

귀에서 쉴 새 없이 나를 독촉하는 시끄러운 음악이


머릿속을 할퀴는 것 같았다.







엄마 이제 힘든 것 같아...

엄마가 있지...
아무것도 하기 싫어



아이들과 밥을 먹다가

무심코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럴 때도 되었지. 엄마가 철인이야?"




놀랄 것도 없다는 듯

아이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몸을 못살게 해, 엄마?

잠도 좀 많이 자고

다른 엄마들처럼

주말에는 소파에 누워서 드라마도 좀 보고 그래.


무슨 낙으로 살아?


쉬는 날에도 똑같은 새벽시간에 뛰러 나가고

그거 끝나면 급하게 가방 챙겨서

공부하러 나가고

집에서도 책상에만 앉아있잖아.


엄마는 그게 행복해?

그게 정말로 좋아?"


아이의 건조한 말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를 괴롭혀온 건가.

나는 진짜 이것이 행복할까?




신호탄이라도 된 듯

내 방 책상에 한가득 쌓아둔 책들이 너무 보기 싫었다.


어느새 의무감으로 읽기 시작한 책들이

미처 끝내지 못한 숙제가 되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조바심이 났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힘겨웠지만 내 집을 마련했고

직장도 생활도 안정되어 갔는데


편안해지는 내 생활이 낯설었다.


책이든 강의든

다 읽고 나서 새로운 것을 또 읽고

또 듣고

쉬지 말고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 머리에 한가득 차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제시간에 이루어놓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는 숙제들로 내 주변은 가득 차 있었다.




"그럼 엄마가 조금 쉬어도 될까?..."


"아무도 엄마한테 그렇게 빡빡하게 살라고 안 했어. 나는 엄마처럼 살면 정말 불행할 것 같아."




행복한 엄마가 되고 싶어서 매일매일 박차를 가했던 내 숙제들을 아이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 막혀하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언제까지 달려야 할까.

얼마나 더 달려야 스스로 평안해질까...



물음표가 계속해서 생겨났다.










구토 증상과

불안했던 내 안의 조바심이

꽤 여러 날을 싸워댔다.




나는 결국


당분간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더하려고 해도 이미 몸과 내 의지가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새벽 3시 58분부터 3분 간격으로 맞춰놓았던 알람을

나는 스스로 해제했다.


습관처럼 소스라치며 일어나던 나에게

조금 더 잠을 허용했다.




한 장이라도 더 읽으려던 책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아이들이 보는 tv 프로그램을 흘끗거렸다.

재미있으면 잠시 구경하기도 했다.


휴일이면 도서관처럼 하루 종일 머물렀던 카페에 일부러 책과 노트북을 가져가지 않고 빈 손으로 앉아있어 보았다.



아이를 데리고 와서 한쪽에 장난감을 놓아주고 행복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는 아이 엄마와,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깔깔대며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들이 보였다.


각자의 휴대폰만 들여다보다가 몇 마디 대화를 하며 웃는 부부가 보였고


생글생글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연인들이 보였다.



누구보다 이곳에 오래 앉아있었지만 한 번도 자세히 보지 않았던 풍경이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니 사람들은 정말 편안하게 이 시간들을 즐기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고 여유로워 보였다.

적어도 나처럼

다급해 보이지는 않았다.




출근길

시동을 걸자마자 빠지지 않고 들었던 부동산 관련 팟캐스트, 동영상 강의를 더 이상 틀지 않고 운전했다.


음악도 켜지 않았다.



그저

그날그날 하늘의 풍경

일출의 장관

흘러가는 구름과 떼 지어 가는 새들...

눈에 들어오는 것을 여과 없이 지켜보았다.




매일 옆구리에 끼고 출근했던 경제신문 구독을 중단했다.

여전히 점심은 혼자 먹었지만 식사 후에 읽을 신문이 없게 되자 밥을 천천히 먹게 되었다.


점심시간에 여유가 생겨서

창가로 의자를 당겨와

넋 놓고 햇빛을 쬐었다.



창밖으로 나무가 보였고

파란 하늘이 보였고

작은 새들이 보였다.



졸음이 오면 졸았다.

죄책감을 느끼려고 하는 내 마음을 타일렀다.


괜찮아

괜찮아

이렇게 해도 돼





내가 매일 해내야 했던 것을 하나씩

중단했지만

시작한 것도 있었다.


음악학원에 가서

드럼 레슨을 신청했다.


몇 년 전에 배웠는데

'지금은 음악 들으며 쿵짝쿵짝할 때가 아니야.'라고 생각해서 그만둔 악기였다.


새벽의 컴컴한 길을 뛰기 위한

정신없는 음악이 아닌

악기와 호흡을 맞춰 연주할 음악을 들었다.

어색한 드럼 스틱을 다시 잡고 기억을 살려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저녁시간들이 흘러갔다.




누군가를 만나는 시간에

책을 한자라도 더 읽고

온라인 강의를 듣겠다며 사람을(?) 끊었었다.



찾아뵙고 싶었던 지인에게 연락을 하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갔다.


찾아가고

만나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전하는 모든 내 행동들에게

'시간이 아깝다.'라는 후회를 입히지 않기로 했다.



마음먹고 찾아갔다면

그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칭찬하기로 했다.



괜찮다고

이렇게 가끔은 시간을 슬슬 흘려보내며

네가 편한 것을 하고

네가 다급해지지 않는 곳에 있고

네가 좀 더 느리게 가도 된다고 여기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항상 되물었다.


왜 사는 거지?

난 왜 살고 있는 거지?


 

그럼 어김없이 정해진 답을 만들어냈다.


왜 살긴.

넌 해야 할 일이 많아

애들도 아직 더 키워야 하고

대출도 갚아야 해.

넌 가장이지만 엄마야.

돈도 더 벌고

청소도 하고

운전도 해야 해

모두 다 너 몫이야



그럼 난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 새벽에 입을 운동복을 한쪽에 쌓아놓고

내일 읽을 책들을 가방에 넣고


내일은

오늘보다 한 페이지라도 더 읽으리라

나를 재촉하며 잠이 들었었다.








왜 사는지

정확히는

아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세월의 흰 눈이

머리 위에 소복하게 내리기 시작하는

그날이 오면



황혼의 내 모습이

행복하게 보였으면 해서

비참하거나

혹은 가난하거나

혹은 불쌍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죽기 살기로 매달려 얻어낸

내 직업에 대한 책임감과


엄마 딸로서 항상 받고 싶었던 칭찬

나를 보며 자부심을 느끼는 엄마 얼굴

모난 돌들이 가득했던

척박하고 고된 당신의 삶에

조금이라도 햇살이 되고 싶었던

내 어릴 적부터의 소망...




그리고 욕심내자면

절대 네가 잘못해서 결혼생활을 망친 게 아니라는 것

이렇게 삶에 열심인 나라서

엄마 자격이 없다고 말한 당신들이 틀렸다고 증명해 보이는 것



그래...

내가 찬바람 부는 세상으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아빠랑 같이 살지 못하는 아이들]로 고생시켰지만

최선을 다해

구김 없이 아이들을 키워내는 것으로

그 죄가 조금은 희석되었길 바라는 마음



너는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가 사회적 잣대, 평균점수에 미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름 '가치가 있었던 삶'으로 여겨지고

수긍받는 것.





사실

나도 살기는 싫었지만


하루마다 차곡차곡 더 얹어지는 걱정과 한숨의 무게에

숨이 막힐 지경이지만



'그렇게 정의되는 나'로

만들고 싶어서

증명하고 싶어서


그토록 두터운 갑옷을 입고

손에 들기도 힘든 검을

힘들지 않은 척 들고 싸우러 나가는

고용된 용병처럼



엄마 뒤에서

깔깔거리며

즐겁게 인형 놀이하고 있는

내 어린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면 안 된다고

그러면 네가 선택한 그 길은 끝이라고

스스로를 달래고

협박하고

무거운 투구를 씌워줬다




내가 뛰지 않으면

내가 잠을 줄이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대신할 사람이 없었고


나도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아이들 문제를 상의를 할 수 있고

오늘은 힘들어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내일로 미루겠다고 말하고 싶고

맥주캔 따면서

소파에 누워 드라마를 보고 싶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아직은 그러면 안된다고

그럴 수 없다고

매일매일

나 자신과 하루를

검열했다.





얘들아,
엄마가 계속 씩씩하게 살긴 할 건데...
지금은 조금 쉬어가도 될까?




엄마.
나 조금 쉬어가도 될까요?

엄마한테 말은 못 했는데요,
사실은 조금 힘들어요


 하루를 매일 숙제처럼 살아내도 살아내도

내일이 되면
하루가 또 생겨버려요
 
그래서 너무 속상했어요




조금만

조금만 천천히 갈게요


엄마만큼은 잘할 수 없겠지만

지금은 숨이 많이 차서

뛰지 못하고 이렇게 걷고 있지만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게요




아름답고 길었던 나의 삶 그 끝에서


여기까지 뛰어오느라 수고했다고

애썼다고

'참 잘했어요' 도장을

꾸욱 받을 수 있을 때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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