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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Aug 17. 2022

엄마의 퇴직

이혼 후 이야기 #. 67




직장에서 점심을 먹고 눈 좀 붙이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느그 언니한테 못 들었나?"


"뭘?"


"아, 못 들었구나."




엄마는 치매환자와 알코올 중독 환자를 돌보는 시골 요양병원에 다니신다.


교대근무를 했지만

야간근무가 끝나면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장화를 신고 논으로 밭으로 향했다.


엄마는 농사꾼이기도 하고, 직장에 다니는 월급쟁이기도 했다.




무섭기만 했던 내 아버지는

엄마가 마흔을 갓 넘겼을 때

육 남매와 홀어머니를 우리 엄마에게 맡기고 갑작스레 하늘나라로 갔다.

 

엄마가 가장이 되던 그날,

육 남매와 시어머니는 엄마의 책임이 되었다.


고등학생인 큰언니가 있었고

나는 12살, 막냇동생은 겨우 3살이었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남편 따라 농사만 짓던 엄마가

남편 초상이 끝나자마자 한 것은

남의 집 농사 품앗이였다.


아버지가 몰던 경운기는 주인을 잃었고,

엄마 혼자서 하는 농사로는

줄줄이 딸린 새끼들과 시어머니를 먹여 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늦가을

과수원에 일하러 가시는 날이면 사과를 얻어오셨고

한쪽 귀퉁이가 썩은 사과를 엄마보다 더 반기며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엄마는 쥐꼬리만 한 돈이라도

매달 들어오는 현금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엄마는

밤과 새벽에는 쌀농사, 밭농사를 했고

낮에는 직장생활을 했다.




정육식당 찬모

군청 급식실 아줌마

여관 청소 아줌마

또 식당 주방 이모

그리고 간병사


일을 바꿔가며

엄마는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다.



엄마가 어제보다 작년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울수록

나이를 더할수록


우리들은 쑥쑥 자랐고

살이 붙었고

학교를 다녔고

사춘기를 거치며 자랐다.



엄마가 3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불판과 그릇을 날라야 했던 정육식당에서 일할 때는 한가한 시간에 엄마한테 가서 식당 한 귀퉁이에 앉아 구워 먹는 삼겹살이 좋았다.


엄마가 여관 청소일을 할 때는

교복 치마 밑으로 꽁꽁 언 종아리를 녹일 수 있는 여관방 구경이 좋았다.




돈 되는 일이라면

추위에 부르튼 발등과 락스에 피부가 벗겨지는 손등도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는 했다.


한 달에 휴일이 하루뿐인 식당일을 10년 가까이 견뎌냈다.

그러고 나서 들어간 곳이 요양병원이었다.

그곳에서 18년이 다 되어가도록 일을 했다.




누워서 꼼짝 못 하는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물수건으로 일일이 닦아준다고 했다.


내 돈 내놓으라고

밥을 떠먹여 주는 엄마의 따귀를 때리는 치매 할머니에게

그래도 꿋꿋이 밥을 먹여드린다고 했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병원 전체를 매일 소독하는 날이 이어지고 병원 종사자라 수시로 PCR 검사를 받아야 하는 날들 속에서도 엄마는 주저하지 않고 출근을 했다.



혹여나

당신이 병원에 피해를 줄까 싶어

자식들도 친정에 못 오게 하고

병원, 집만 오갔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확진되어 격리되면

나머지 근무에 엄마가 투입되었다.




밤낮 없는 고된 병원일을 전해 듣기만 해도 숨이 막혀서

차라리 엄마도 확진돼서 집에서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못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엄마도 이제는 노인이 되었는데

매일매일 답답한 마스크를 쓰고 노인환자들을 돌봤다.

엄마보다 젊은 환자들을

닦아주고 먹이고 씻겼다.









어제 야근하고 아침에 퇴근하려는데
병원장님이 날 좀 보자고 하더라


엄마는 직감했다고 하셨다.

병원장님이 왜 당신을 부르는지.

왜 병원장실에 잠깐 들어오라고 하는지.




오랜 시간 같이 일했던 병원장님은

엄마가 몇 년 전부터 절뚝거리던 한쪽 무릎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동안 병원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정이 들었지만

우리 엄마는 간병일에는 능숙하나

몸이 늙은

'고령 직원'이었다.



 

평소 유쾌하던 말투와 다르게 엄마에게 '퇴직'이란 단어를 어렵게 꺼내는 백발의 원장님을 바라보며 엄마는 말했다.



"원장님,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십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이 병원에서 월급 받고 지내온지도 벌써 18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동안 이 병원 덕분에 또 원장님 덕분에 여기서 월급 받아가 빚도 다 갚았고 애들 학교도 싹 시켰십니다. 참말로 감사합니다."







엄마만큼 일하는 사람 있는 줄 아나?
병원이 손해지 뭐.
잘됐다! 그만둬버려 엄마!



엄마가 더 이상 소독약 냄새나는 병원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고, 치매환자들에게 욕설을 듣지 않아도 되고 남의 오물을 치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도 후련하다 싶었다.

엄마가 더 이상 고생하지 않는 것, 내가 바라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이제 일터에서도 나오지 마라 하고 나도 이제 다 됐다. 하하하."




엄마가 이제 출근하지 않는다는 건

내가 철이 든 이후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된 일이 되었다.


"뭐가 다되? 뭐, 일하지 마라 하면 다된 건가! 엄마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가라앉는 엄마 목소리보다 더 크게 큰소리를 치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직장에 그만 나올 것을 통보받았고

우리 엄마는 일흔을 훌쩍넘긴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전화를 끊고

뒤로 넘겨두었던 의자를 다시 고쳐 앉아

목베개를 서랍에 도로 집어넣었다.


식곤증으로 몰려오던 잠이

저만치 싹 달아났다.




... 엄마는 이게 문제다.


항상 나를 가만히 안 둔다.

이렇게 꼭 말 한마디로 눈물 터지게 한단 말이다.




'엄마가 다 됐다고? 뭐가 다 됐는데? 그래도 엄마는 힘센데. 그래도 엄마는 내가 볼 때 제일 기운이 센 여잔데!'



엄마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핸드폰만 괜히 노려보았다.



퇴직하는 건 엄마인데

내가 갑자기 분하고

속이 상했다.




원장님실에서 나와

직원 주차장 한 귀퉁이에 있는

엄마의 낡은 오토바이에 힘없이 시동을 걸었을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어쩌면

병원 사물함에 짐을 언제 뺄 건가를 고민했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월급 덕분에 계속 붓던 적금을 어떻게 할 건가를 고민하셨을까.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는 이사를 했고

마당 한편에 화장실을 만드는데

정화조를 묻을 구덩이를 파야했다.


지금 생각하면

굴삭기 장비를 반나절만 빌려도 쉽게 팔 수 있는 구덩이를

돈이 없는 엄마는 며칠 동안 삽 한 자루로 혼자 파내려 갔다.



화장실은 두 칸이었고

두 칸만큼의 큰 정화조를 묻어야 하는데

엄마는

엄마는 며칠에 걸쳐 혼자 그걸 다 팠다.


'이 멍청아, 내가 왜 그걸 안 도와드렸지?'


그때의 어렸던 나를 원망해도 이미 늦었다.

엄마가 한삽한삽 힘겹게 뜬 만큼

그 가냘펐던 몸이 더욱 낡아버렸을 테니까.


엄마는 그렇게

혼자 다하셨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 사셨던 시어머니 뒤치다꺼리도

자식들 양육도

쌀농사도 밭농사도

모두 다 모두 다...



자식들에게 보낼 옥수수는 피곤한 몸을 깨워 새벽 1시에 꺾으러 나가셨고

달빛에 더듬더듬하며 밭고랑을 매셨다.

동이 트면 병원으로 출근해 환자들을 돌보고, 면회객을 받고, 밤샘근무를 하면서 당신 몸이 영원할 것처럼

한 번도 아프지 않을 것처럼

혹사시켰다.


그랬던 엄마가

이제 출근 안 해도 된다는데

내 마음이 왜 이런 걸까.




... 나도 이제 다 되었다


더 이상 월급을 아니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

가슴이 콕콕 아팠다.



"개같이 벌더라도 정승같이 써라."



엄마는

발이 시리고 손이 부르트는 고깃집 주방일로

손님들이 어지럽히고 간 여관 침대를 정리하면서

수도 없이 화장실 변기를 세재로 닦아내고

노인들의 대소변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정말 억척스럽고 험하게 돈을 벌었다.



엄마는 그렇게 돈을 벌었다.

그리고 정승보다 더 가치 있게 쓰셨다.



'가시나'라서 인정받지 못하는 줄줄이 사탕 같은 딸들과

내 아들, 손자 잡아먹은 년이라고 늘 욕을 하는 시어머니를

굶지 않게 했다.

남편이 말도 없이 남기고 간 빚을

모두 갚아나갔다.



홀로 힘들었던 그 시간을 좀 벗어나라는데도

이제는 좀 쉬라는데도

엄마는 왜 서운해하실까.



무릎이 아파서 더 이상 계단을 오르내리지도 못하면서

왜 서운해하실까.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는 왜 마냥 기쁜 것이 아니라

심통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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