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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Aug 18. 2022

퇴직한 엄마에게 상장을 수여합니다

이혼 후 이야기 #. 68





엄마는 성적표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지만

상장에는 늘 과하게 칭찬을 해주셨다.



상을 받은 날이면

학교에서 한달음에 뛰어와 엄마가 퇴근하는 밤 시간까지 기다렸다.

 

고단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온 엄마가 투박한 손으로 상장을 읽으시는 걸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이고 광대가 승천했더랬다.



"뭐, 이런 거는 웬만하면 다 받는다 아이가. 대단한 것도 아니다!"

무심한 척 내뱉으며

곁눈질로 엄마 표정을 훔쳐보는 것이 즐거웠다.

행복했다.


학교만 빠지지 않고 잘 나가도 받고

그림을 조금 더 공들여 그려도 받고

백일장엔 어김없이 받을 수 있었던 상장.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다는 엄마를 웃게 하는 유일한 내 재주였다.



엄마가 좋아했던 상장.

이제는 엄마에게 그 상장을 주고 싶었다.



생계를 위해 쉴 수가 없었던 지난날들을 모두 보상해드릴 수는 없겠지만, 엄마가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고 있다고

우리가 모두 기억한다고

그래서 너무 감사하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상장에 어떤 내용을 써야 하나..."


엄마의 고단한 세월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할

단 몇 줄을 생각해내는 것도 시간이 걸렸다.



어떤 문장으로 표현해도

그 고생을

그 세월을

완벽하게 칭찬할 수 없었다.

담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빚이 있어

돈 백만 원 대출도 어려웠던 그때,

보증을 서줄 사람이 없으면 1원도 대출을 해줄 수 없다는 농협 직원의 말에 창피한 것도 모르고 눈물을 왈칵 쏟았다고 했다.


창피한 것보다 앞날이 막막해 농협 창구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는 엄마였다.


남편 없고 재산도 없고 빚만 덩그러니 갖고 있는 시골 여자에게

선뜻 보증을 서주겠다는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고깃집에서 일할 때, 고기 썰고 나면 부스러기가 많이 나왔다.

사장은 그걸 비닐봉지에 넣어서 밖에 내놨다.

쓰레기로 버릴 거니까...

그거를 내가 봐 놨다가

퇴근할 때 몰래 자전거 뒤에 실어서

집에 갖고 왔지.


먹을 수 있는 것만 골라서 한 냄비 볶아주면

니들이 얼마나 맛있게 잘 먹었는 줄 아나?

내가 그때는... 참 많이도 그렇게 실어날랐제..."



엄마가 식당을 다니니까

고기를 싸게 많이 사 오시는 줄 알았다.


살코기보다 비계가 대부분이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가끔 원 없이 고기를 먹었다.





"군청 급식소에 일할 때는 그나마 퇴근이 빨랐다아이가.

장날에 저녁쯤 되면 콩이며 팥이며 헐값에 팔거든.

장 끝나갈 때쯤 퇴근길에 시장에 가서 그걸 흥정해서 싸게 사놨다가

옆 동네 5일장이 서면 출근하기 전에 잠깐 장에 들러서

길에 펴놓고 팔았다.

값을 조금 더 받고 말이다.


운 좋을 때는 이천원도 남고, 삼천원도 남고.

얼마나 기쁘던지!

그 재미로 머리에 참 많이 이고 다녔제.

니들은 한창 클 때니까 얼마나 잘 먹었겠노.

그렇게 반찬값도 벌었더랬다."




천 원, 이천 원에

엄마는 출퇴근 시간에도 땀이 나도록 뛰었다.



비계 섞인 돼지고기조차 마음껏 먹일 수 없어서

돈이 없어서

보증을 서줄 사람이 없어서

혼자 발을 동동 굴렀을 엄마를 위해 상장을 주문했다.

그리고 상장 한 면에 돈을 가득 붙였다.





얼마 되지 않는 이 돈.



가난에 숨 막혀했던 그때의 엄마에게

농협 창구 앞에서 울었던 젊은 엄마에게

이 돈을 드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장을 가방 깊숙한 곳에 소중하게 챙겼다.

휴가를 내고

아이들을 태우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화원에 들러 화분을 샀다.


'축 퇴직'이라는 리본도 달았다.

거창한 퇴임식은 아니겠지만

엄마를 축하해주고 싶었다.



외할머니가 직장을 그만두셨다니까

퇴직에는 '기념패 받는 맛'이라며

아이들도 덩달아 기념패를 준비했다.



엄마가 차려놓은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가방에서 상장과 기념패를 꺼내왔다.

아이들이 기념패를 큰소리로 읽어드렸다.



그리고 상장을 드렸다.

엄마 앞에서 떨지 않고 태연하게 읽을 자신이

나는 없었다.



엄마는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의 상장을 펴서 읽으셨다.



상장을 들고 읽으시는 모습은 예전과 같은데

우리 엄마는 늙어있었다.






더듬더듬

자신의 공적을 읽어 내려가는 엄마를

작아진 노인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작은 몸과 투박한 손이

도대체 그동안 어떻게 쓰인 걸까.

젊은 새댁이었던 엄마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걸까.


이렇게 작은 체구를 가지고

얼마나 이를 악물고

버텨온 걸까.


대체 엄마의 깡다구는

그 끝이 어디일까...





감상에 젖어 눈물이 펑펑 날줄 알았는데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엄마도 울지 않았다.




... 고맙다



엄마는 이 말만 반복했다.

고맙다

고맙다고.



이제 좀 먹고살만하다고

이런 걸로 생색내는 나 같은 딸에게 말고

엄마 자신에게 고마웠으면 좋겠다.



만만치 않았던 그간의 세월

닦아주는 이 없었던 서러운 눈물과

끝이 보이지 않았을 고단했던 노동


빚과 부양의 책임만 있었던 당신 스스로에게

지금까지 정말 애썼노라고

대단하다고

진짜 수고했다고

정말 고맙다고 하셨으면 좋겠다.





자식들을 키우며 빚들을 다 갚고

노령연금에 월급을 더 보태 적금까지 하는 엄마.

통장엔 나보다 현금이 많은 부자인데도

상장에 붙어있는 돈을 부담스러워하셨다.


너무 큰돈이라 하셨다.



"누구한테도 쓰지 말고,

꼭 엄마가 하고 싶었던 것에 쓰세요. 이 돈."




고향에서 올라오는 길.

엄마는 손녀들에게, 다 큰 딸에게

용돈을 챙겨주셨다.


잠시 엄마에게 갔을 뿐

결국 다시 나에게 오는 엄마 돈.


엄마 마음.






엄마


아침에 늦잠도 좀 주무시고요


매일 하던 귀찮은 화장, 그것도 하지 마세요


시간에 쫓겨 한밤중에 손으로 더듬더듬하며


밭고랑 매지 마시고


뜨거운 낮에는 파자마 입고 낮잠도 좀 주무세요



멀리 살아 보고팠던 딸들 집에도 이제 느긋하게 놀러 오시고


비계 섞인 부스러기 돼지고기 말고


맛있고 비싼 부위로 사드세요





엄마 젊을 땐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다고 하셔서 안심이 되었는데


이제 직장을 안 나가시니 시간은 좀 남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죽을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 없어야 돼요.




나 먹으라고 고등어 안 구워주셔도 되고


손녀들 용돈 안 주셔도 되고


옥수수, 콩, 쌀 안 보내주셔도 되니까


그런 건 다 괜찮으니까




그것만 약속해주세요.



퇴직했는데도 여전히 죽을 시간은 없다고.


오래오래 그 말은 지키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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