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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했어도 귀한 내 새끼

이혼 후 이야기 #. 79

by 연극배우 B씨



퇴근하고 집에 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노트북을 열었다.




청구인은 미성년자이므로 법정대리인(친권자모) 000


주 문

사건 본인의 성을 "0"으로, 본을 00으로 변경할 것을 허가한다.

이 사건 청구는 이유 있으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다.




심판 결과서 상단에는 여전히 아이의 성이 전남편 성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 아래에는 엄마의 성과 본으로 변경을 허가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혼자 전자소송을 했던 큰 아이의 성본변경도 얼마 전에 법원에서 허가한다는 문자를 받았다고 했다.




[저는 이제 곧 성인이 되므로 기존의 아빠 성으로 살아온 시간보다 엄마의 성본으로 살아갈 날이 더 길기에 대학 생활 및 미래의 취업 등 사회적 관계가 커지기 전에 성본을 변경해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상황을 미리 대비하고자 합니다.


이미 성인이 된 친언니도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현재 성본 변경을 진행하는 중이며, 언니와 함께 성본을 함께 변경해 지금까지 친자매로서 함께 한 소속감과 안정감을 그대로 가져가고 싶습니다.]


둘째는 언니의 성본변경만 허가되어 자기 혼자 아빠 성으로 남게 될까 봐 진술서에 좀 더 공을 들여 자신의 생각을 써내려 갔었다.

아빠의 성본과 아빠의 또 다른 자녀와 불편하게 얽힌 이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아이의 몸부림인 것 같아 진술서를 읽는 내내 마음이 짠하였다.


감사하게도 이제 둘째의 성본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법원에서 준 둘째의 성본변경 허가서를 가지고 시청에 갔다.

판결이 끝이 아니라 시청 민원실에서 성본변경 신청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수년 전에 나는 이혼 판결문을 가지고 시청에 가서 이혼신고를 했었다.


이미 판결이 난 이혼이었지만 빨리 이혼 신고를 하지 않으면 그동안 진탕에 뒹구는 듯한 모멸감과 이들의 양육비를 가지고 딜을 하던 상대편과 싸웠던 그 발버둥이 물거품이 될까 봐, 이혼판결이 취소가 돼버릴까 봐 너무 불안했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이혼 신고서를 제출하고 나오는 길, 시청마당의 햇살은 놀라우리만큼 따사로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신청되었습니다.
일주일 뒤에 등본 떼보시면
판결문대로 성본이
바뀌어져 있을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신분증을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타박타박 시청 민원실을 걸어 나왔다.

하늘이 잔뜩 흐려있었다.


쌀쌀한 날씨에 이내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하나도 춥지 않았다.




아이들이 내 성으로 바꾼 것에 대해 크게 감흥은 없었다.


성을 바꾸는 것에 대해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눠왔지만 그래도

'왜 굳이 성본까지 바꾸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또다시 들었다.




아이들이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아빠에게 원한 건.

아빠 성까지 내려놓으면서

아빠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




큰애가 성본과 이름까지 바꾸고 싶다 했을 때 나 혼자서는 판단이 서질 않아

엄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엄마, 애들이 내 성으로 바꾸고 싶다는데요-


엄마는 잠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옛날 어른이니까 반대할 줄 알았다.




-죄는 지은대로 가고 공은 닦은 대로 간다고 했다.

자기 복을 스스로 걷어차고 누나들 치마폭에 싸여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스무 살도 안된 자기 딸들한테 성씨까지 외면당하고 그 무슨 수모냐!

누나라는 것들 다섯 명 중에 한 명이라도 양심 바른 여자가 있었다면 남동생을 이렇게까지는 처참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누나 중에 한 명이라도 동생 바로 잡아 줬어야지.


귀한 내 새끼 가슴에 못 박아 놓고,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서투르게 한 자 한 자 눌러 보냈을 장문의 문자메시지에서 엄마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실시간으로 들리는 듯했다.



귀한 내 새끼 가슴에 못 박아 놓고



귀한 내 새끼

귀한... 내 새끼




그래

엄마에게 나는 귀한 새끼였다.

그들에게 무시당하고 철저하게 외면당하며 불행한 삶을 살라고 결혼시켜 보낸 자식이 아니었다.


나 살겠다고 맨몸으로 아이들만 둘러업고 달동네로 숨어 들어갔으나 엄마에겐 귀한 자식이었다.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둬라. 오죽하면 그 속이 썩어나가서 아빠 성까지 싫다고 하겠냐."




애들 아빠가 재산이 많아 나중에 (이복) 동생과 재산 싸움하며 얻을 콩고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설령 쥐꼬리만큼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끈 삼아서 아빠 부양의 책임이라도 지게 될까 봐 엄마는 이참에 잘 됐다고 했다.

어떤 것으로든 연관이 되는 걸 싫어했다.




"이제 개명까지 되고 나면 전화번호도 바꿀 거야."


"잘 쓰던 전화번호는 또 왜?"


"아빠가 나 어릴 때 핸드폰 개통해 주면서 뒷자리를 아빠네 집안 번호로 해놨잖아."


그러고 보니 애들 아빠네 전화번호 뒷자리는 모두 통일이다.


우리 애들 번호도, 고모들 번호도, 결혼해서 낳은 그 아이 핸드폰 번호도.


영락없는 한 가족이다.




번호까지 바꿔버리겠다니



몇 년이고 어떤 경우고 다 참아내다가 이게 정말 아니라는 최종판단이 섰을 때 뒤돌아보지 않고 다 정리하고 곧장 직진하는 저 성격...

피는 못 속이는 건가.



똑같구나, 나랑



그러니까 아빠가 혀를 찼겠지

네 엄마랑 성격이 똑같다고 말이야.




아빠가 눈썰미는 있다 그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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