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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현 Mar 20. 2019

산티아고의 잉여로운 일주일

칠레_산티아고

산티아고의 일주일, 일주일이 지났다. 이 기간 동안 특별히 한 것은 없다. 먹고 자고, 아주 조금 걷고 또 먹고 잤다. 여행이라는 것을 와서 별다른 것을 하지 않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이곳처럼 마음마저 편한 곳은 없었다. 


오기 전부터 한인민박으로 이미 8박을 예약했다. 내가 머무른 곳이 한인민박이라는 것이 산티아고의 일주일을 편하게 만들어 준 가장 큰 요인이다. 숙박비에는 아침과 저녁이 포함돼 있다. 하루에 두 끼만 먹고 다니던 나는 그것만으로 충분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낯선 곳을 헤맬 이유가 없었다. 일어나면 부엌으로 가 아침을 먹고 침대로 돌아와 누워 있다가 시간이 지나 배고파질 만하면 저녁이었다. 그러면 그대로 저녁식사를 하면 됐다. 이 먼 곳까지 와서 아무것도 안 하는 나를 처음에는 사장과 스탶이 이상하게 여겼고, 다음에는 다른 여행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한인 민박에 머문 지 나흘 만에 ‘화석’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여행을 와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우유니와 아따까마에서의 힘듦을 보상하는 시간이라고 정당화됐다. 밖으로 나가진 않았어도 민박집 안에서는 나름의 활동이 있었다. 마치 스탶인 것 마냥 계속 머무르다 보니 오고 가는 여행자들을 계속 볼 수 있었다. 그중에 칠레 북쪽으로 여정이 남은 사람에게는 나의 경험을 얘기하며 팁을 전했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조언을 구했으며,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과는 추억을 공유했다. 특히 에콰도르 키토의 적도 박물관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며 아무나 아무데서나 계란을 세울 수 있다는 주장에 ‘계란형’이라는 두 번째 별명도 얻었다. 


서로 다른 여행자들끼리의 시간 계획이 맞지 않아 대부분은 민박집에 한 두 팀은 있었으나 나흘 만에 나만 있는 상황이 발생했다. 심심하기도 해서 처음으로 민박집 주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산 크리스토발 공원을 다녀오고 다음날엔 기억과 인권 박물관을 가기도 했다. 가끔 예쁜 골목도 발견했지만 대체로 매연이 심해 산책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듯했다. 


산책을 갔다 왔다고 말하니 사람들이 놀랜다. 당연한 것을 안 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것을 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해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다음날은 또 민박집에서 쉬었다. 그럼에도 저녁이 되면 사람들이 모여 여행 얘기를 했다. 사업차 산티아고를 와서 젊은이들이 여행을 와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낸다며 한탄하는 사람부터, 대학의 첫 학기를 끝내자마자 여행 온 젊은 친구들의 이야기, 남미가 실제로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칼 테러의 피해자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중에 6개월 간 아프리카를 종단한 친구의 얘기가 하이라이트였다. 민박집의 사장님은 이러한 이야기들에 흥을 돋우려는 듯 치킨을 시켜주셨다. 후라이드 치킨, 간장 치킨, 마늘 치킨. 실로 오랜만에 먹는 한국식 치킨의 맛에 맥주는 금방 끝을 보였다. 


별 일 없어도 시간은 마구 흘렀고, 나보다 늦게 온 사람들이 먼저 떠나는 것을 여러 번 지켜보며, 나 역시 슬슬 이동할 것을 마음먹었다. 편안한 침대와 맛있는 음식, 재밌는 이야기들이 있었던 산티아고의 기억은 산티아고였기 때문에 겪을 수 있었던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요인이 무엇이든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들은 머물렀던 도시에 대한 이미지마저 바꿔놓는다. 산티아고에서 특별히 한 일이 없음에도 좋았던, 어쩌면 그래서 좋았던 산티아고다. 

요즘의 한국을 보는 듯한 
난 항상 예수가 높은 곳에 있는 게 불만이다. @Cerro San Cristobal
칠레 속의 작은 한국
Old and New  @아르마스 광장
박물관은 학교다 @Museo de la Momoria y los Derechos Humanos
다른 날, 다른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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