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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현 Apr 10. 2019

살아있는 빙하 위를 걷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

아르헨티나_엘 칼라파테

북극과 남극이 아닌 곳에도 빙하가 있다는 사실을 여행을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것도 내가 갈 예정이었던 아르헨티나에 있었다. 그렇다면 한번 보러 가야 하지 않을까? 북극과 남극을 가게 될 일은 기약하기 어려웠고 가까운 곳에 두고서도 지나친다면 아쉽지 않을 수 없었다. 


우수아이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빙하를 보러 엘 칼라파테(El Calafate)로 넘어왔다. 이곳에 있는 빙하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라는 이름으로 남극과 북극(그린란드)에 있는 빙하를 제외하곤 가장 큰 빙하라고 했다. 인구 2만 명이 조금 넘는 작은 도시에 공항이 있을뿐더러 7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들이 있다고 했다.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빙하를 보러 오는 것이다. 나 역시 기꺼이 그중의 한 명이 되었다. 


숙소에서 추천받은 여행사와 상품으로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보기 위한 길을 떠났다. 버스로 한 시간을 이동한 뒤 배로 옮겨 탔다. 이 배를 타고 아르헨티노 호수를 따라 페리토 모레노 빙하로 향할 것이다. 호수 위에는 많은 유빙들이 있었다.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얼음들이다. 아직 빙하는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배는 움직였고 바람이 차가워지는 것 같다는 착각 속에 드디어 빙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대보다는 작은 규모였다. 세계 세 번째로 크다는 말에 했던 기대가 조금의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 거대한 광경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왜곡하는 경우가 있다. 아마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저 멀리 보이던 빙하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왜 이것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지 알려줬다.


무지 컸다. 높고 넓었으며 하얗고 파랬다. 크기를 비교할 만한 다른 무언가가 없어 아쉬울 뿐이었다. 빙하 앞에 아파트를 한 채 갔다 놓으면 그 규모를 실감할 수 있을까. 숫자상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조합해 머릿속 상상을 통해 크기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높이 4~80m, 폭 5km, 길이 35km)


선상의 빙하 감상을 마치고 그 위로 올라갈 시간이다. 호수의 반대편에 내려 신발 위에 아이젠을 겹쳐 신고 가이드의 뒤를 따라 빙하의 한 구석으로 간다. 간단히 주의사항을 듣고 얼음 위로, 빙하 위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처음엔 여느 스케이트장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어느 정도 빙하를 올라갔다 싶어 더 넓은 풍경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빙하를 보러 예까지 온 것이 잘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맑아지는 하늘 아래 빙하는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투명하거나 흰색이거나 하지 않았다. 너무 깨끗한 것은 파랬다. 빙하의 녹은 물이 고인 곳도 깨끗하다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조금 더 깊게 고인 곳은 짙어지는 푸른색에 두려움마저 느낄 정도였다. 실제로 크레바스는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으니 조심하긴 해야 한다. 빙하 위의 산책은 빙하조각을 띄운 위스키와 함께 마무리됐다.


아직 떠나긴 이르다. 빙하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기 위해 전망로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 길을 걷다 보면 가끔 굉음을 듣는다. 안데스 산맥으로부터 천천히 이동해오는 살아있는 빙하가 최후의 순간을 버티지 못하며 붕괴되어 떨어지는 소리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 보면 큰 소리와 함께 빙하가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빙하의 붕괴 장면은 지구온난화를 경고하는 자료화면으로 자주 등장하지만 이곳의 붕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붕괴되는 빙하 위로 35km에 달한다는 빙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록 일부밖에 안 보이지만 상상할 수 있는 만큼 상상해봤다. 오직 얼음으로만 이루어진 머나먼 길, 그 길은 하루에 2m씩 천천히 전진하고 있다. 내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지구의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자연의 위대함은 어떤 하나를 한 곳에 대량으로 모아 놓았을 때 더 쉽게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 맞이한 모래와 소금과 얼음이 그렇다. 이카의 모래사막, 우유니의 소금사막, 그리고 엘 칼라파테의 빙하를 차례대로 만나고 나니 지난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자연이 내게 겸손하라며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 


거대한 빙하를 만나고 돌아온 엘 칼라파테는 더욱 아담하게 느껴진다. 주요 거리는 10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작은 곳이다. 그 작은 마을 곳곳에 아기자기하게 예쁜 거리와 건물과 장식을 볼 수 있다. 애써 꾸미려 하지 않는다면, 자연이나 인간이나 아름답다. 


El Calaf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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