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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혈거북이 Aug 13. 2017

기억 끄집어내기 놀이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벌레는 내가 잠이 들었을 때, 밥을 먹을 때, 길을 걸을 때, 그녀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컴퓨터를 하는 이 순간 조차  끈임 없이 내 기억들을 먹어 치운다. 흥미로운 일을 겪었을 때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막상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이 오면 싸구려 흑백 필름 영화처럼 영상은 툭 툭 툭 끊어지고 만다. 고장난 비디오를 두 손으로 탁탁 쳐보고, 흔들어도 보지만 소용이 없을 때가 많다. 결국 흥미로웠던 그 일은 이도 저도 아닌 평범한 일이 되고 만다.


 가끔은 내 친한 친구의 이름 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당사자의 앞에서 이름이 기억 나지 않을 때 홀로 굵은 식은땀을 흘리며 나에게 말을 걸지 않기를 기도한다. 3자 간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와의 사소한 기억까지 끄집어 난 후에야 마침내 그의 이름을 떠올렸을 때의 카타르시스란!


 이러한 나의 기억력은 종종 오해를 사기도 한다. 얼마 전 회사에 도통 이름이 낯선 아르바이트 친구가 있었다. 매일 그에게 일을 시킬 때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일을 시키는 대신 스스로 일을 하곤 했는데, 하루는 일이 너무 많아 그의 이름을 생각나는 대로 부르고 말았다. 그의 실명은 '동조' 였는데, 난 그를 '정환'이라고 불렀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하지만 그는 눈치껏 자신을 부르는 상황임을 알아 차렸고, 나는 그의 눈치있는 행동에 지레짐작 그의 이름이 맞겠지 하고 몇 달을 정환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그렇게 부른 지 약 1달이 지난 후 후배의 "그런데 왜 동조를 정환이라고 부르나요?"라는 질문에야 그의 본명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어렵다며 멋쩍게 웃었지만 그 때 얼마나 미안했는지. 


 하루 전의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1년 전, 3년 전, 10년 전 어느 순간이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 내가 그 날로 돌아가 있다는 착각을 할 때가 있다. 문득 1년 전 오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나의 2016년은 프린트에 용지 365일 장을 넣고 복사 버튼을 누른 것처럼 너무나 똑같았기에 어느 정도의 힌트는 필요 할 것 같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억들 대부분은 지극히 평범했었던 일상이었음을 볼 떄, 결국 이런 시시한 날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 내가 즐겨하는 놀이는 기억 끄집어내기 놀이이다. 어제도 잘 기억 못하는 사람이 가진 취미라고 하기에는 심히 아이러니하다. 닥치는대로 이 날, 저 날의 기억을 끄집어내다가 재미있는 기억들이 떠오를 때 그것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거치는데, 상상 속에서 나는 꽤나 훌륭한 작가여서 종종 아주 흥미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내곤 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작업은 너무 힘들고 어려워 결국 4년쨰 새해의 다짐으로만 끝나고 있지만, 오랜만에 옛날의 시시한 일들을 조금 떠올려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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