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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Sep 19. 2024

김애란 <이 중 하나는 거짓말>


지우는 어려서부터 지우개를 좋아했다. 작고 말랑한 데다 한 손에 쏙 들어오고 값도 비싸지 않아서였다. 훌쩍 키가 자란 뒤에도 지우는 종종 우울에 빠져들 때면 손에 미술용 떡지우개를 쥐고 굴렸다. 그러면 어디선가 옅은 수평선이 나타나 가슴을 지그시 눌러주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대단히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어도 그럭저럭 무난하고 무탈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일었다. 물론 그런 기분은 잠시뿐이고, 나쁜 일은 계속 일어나며,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는 걸 알았지만, 스스로에게 희망이나 사랑을 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해 지우는 자신에게 겨우 '할 일'을 줬다. 그중 하나가 연필 가루 위에 연필 가루를 얹는 일, 선 위에 또 다른 선을 보태는 일이었다


김애란 작가님의 신작 장편소설이 나왔기에 예약 구매를 하고, 시간이 좀 지나 책을 받았다. 오랜만에 작가님의 책을 읽는 것이라 기대가 컸다. 최근에 작가님의 초기작들을 읽으면서 넓은 스펙트럼에 감탄했었는데, 이 작품은 어떤 내용일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 나갈지 궁금했다.


우선 제목부터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 중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부터는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표지에 그려진 세 사람, 그리고 책 뒷면의 내용으로부터 책의 분위기가 어떠할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책 뒷면의 글은 너무 스포가 되는 건 아닐까?)


표지의 그림에서 맨 위는 아마 '소리'일 것이고, 가운데와 아래 중에서는 누가 '채운'이고 '지우'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가운데가 채운, 아래가 지우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책 속에서 텍스트로만 보았던 인물들을 표지를 통해 뒷모습을 보니 각각의 인물들이 어떤 심경인지가 더 잘 느껴진다.


작품의 시작은 지우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작품의 끝부분과 연결된다. 시작부터 다소 갑작스럽긴 했지만, 작품을 한 번 더 읽어달라는 작가님의 의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다음은 전학 온 채운과, 그를 보는 소리의 이야기다. 채운에게 담임은 '이 중 하나는 거짓말' 게임을 통해 자신을 소개해 보도록 한다. 채운은 마지못해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던 중 교실에 앉아 있던 지우를 보고 놀란다. 거기에서 채운과 지우의 연결 고리가 생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 이전에 형성된 것이었다. 둘의 관계는 궁금증을 자아내고 차차 밝혀지지만, 정작 채운이 궁금해하는 것도,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것도 미결로 남았다.


- 규칙은 간단해.

담임이 여유로운 태도로 주위를 둘러봤다.

- 다섯 문장으로 자기를 소개하면 되는데, 그중 하나에는 반드시 거짓말이 들어가야 해. 소개가 끝나면 다른 친구들 이 어떤 게 거짓인지 알아맞힐 거고. 그럼 나머지 네 개는 자연스레 참이 되겠지? 선생님 말 이해했어?


채운이 자신을 소개하는 동안, 소리는 채운을 통해 자신을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놀라운 능력과 그것이 가져오는 슬픔도. 작품 내에서 종종 나타나는 소리의 능력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리는 스스로도 그러한 경험을 감내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러한 것을 겪어야 하기에 받아들인 듯하다.


그렇게 세 사람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되는데, 사실은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라 하나씩의 단편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김애란 작가님은 문장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쓰기 때문에, 문장을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중요한 내용이나 감정선을 놓칠 수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이 장편이기는 하지만 단편의 속성들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편 같은 장편처럼 느껴졌다. 전체 분량이 적은 것도 그렇게 느껴지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편이 아닌 장편의 형식을 취한 것은 그 세 사람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야기는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그래서 장편으로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작품 내에서는 소리와 채운, 지우와 소리, 채운과 지우가 연결되는 접점이 그려진다. 하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연결은 아니며, 각각 반려동물이라는 매개체와 어떠한 '사건'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상황을 상대방에게, 그리고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세 사람은 각각의 비밀을 갖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자신의 부모님과 관련이 있다. 비극, 슬픔, 그리고 상실감.


소리가 채운에게 알겠다고 답한 뒤 가만 제 손을 봤다. 그림을 배운 이래 지금까지 수백 번도 더 그린 손이었다. 또래에 비해 특별히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손, 눈에 띄는 점이나 흉터 하나 없는 손. 그런데 그 손이 가끔 이상한 일을 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소리와 채운만 아는 일이었다.

'이야기가 가장 무서워질 때는 언제인가?'

소리가 슬픈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때'

그런데 채운은 지금 무서운 이야기 속에 갇혀 있는 모양이라고, 거기서 잘 빠져나오도록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리는 곧 채운과 만날 예정이었고, 그건 하나의 비밀이 다른 비밀을 돕는다는 뜻이었다.


그 세 사람은 상대방과 상대방의 일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본의 아니게 그와 연관되었고, 자신은 몰랐지만 상대방의 비밀을 지켜주게 되었다. 그래서 책의 소개에서 "하나의 비밀이 다른 비밀을 돕는다는 뜻이었다"라고 했을 것이다.


김애란 작가님의 작품답게 담담하면서도 치밀한 내면 관찰, 그리고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인물들의 심경을 그려내고 있다. 특히, 주인공들이 고등학생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그에 적절한 요소들을 이용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을까. '김애란'이라는 이름에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흐릿하고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는 점도 있다. 아무래도 세 사람의 이야기를 번갈아 하고, 또 주변 인물들도 있으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소재들은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에 과몰입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마치, 새로운 것을 알게 되어 그것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고 싶은 아이들처럼. 그래서 비교적 길지 않은 내용임에도 몰입하기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을 듯하다.


또한 너무 많은 죽음은 과유불급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는 마치 지우가 생각했던 '모두가 죽는 이야기'의 다른 버전이 아닐까. 그래서 슬픔의 과잉으로 인해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기가 벅찼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지우가 주변 사람들을 통해 삶에 생각을 고쳐 먹었던 것처럼, 작가도 결국에는 '사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결국 자신에게 주어지는 결말이란 이런 거구나 싶어 가슴에 냉기가 돌았다. 실제로 지우는 <내가 본 것>을 시작하며 모두가 죽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 그리고 어느새 지우는 '다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결국 그 마음을 내려놓는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본 것> 마지막 화는 바로 그런 마음을 담아 끝낸 거였다. 그런데 삶은 지우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우가 누군가를 살리는 이야기를 쓴 순간 삶은 가차 없이 지우에게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데려가버렸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는 돌아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죽은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이 주인공이라는 것. 지우개는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타내고 표현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은 죽음 역시  같은 속성이라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죽음을 통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 죽음의 대상과 형태는 달라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


벌써 일 년이 훨씬 지난 일인데 모든 게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지우는 화면 속 태오의 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그러곤 전자 펜으로 지우기 기능을 이용해 태오의 눈가에 어린 물 기를 수정했다. 마치 그림 속 인물의 눈물을 닦아주듯 펜 끝으로 눈가의 물기를 지우고 또 채워나갔다. 지우가 이해하기로 지우개는 뭔가를 없앨 뿐 아니라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대상에 빛을 드리우고 그림자를 입힐 때 꼭 필요했다. 그 대상이 사물이거나 인물, 심지어 신일 때조차 그랬다. 누구든 신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는 신의 얼굴을 조금 지워야 했다. '광원', 즉 빛이 출발한 곳을 먼저 파악해 빛이 닿는 곳은 어둡게, 그렇지 않은 데는 밝게 표현하는 게 기본이었다. 
동시에 지우는 지금까지 아저씨가 한 말이 왜 그렇게 불편하게 다가왔는지 깨달았다. 이 게임의 목적은 얼핏 '거짓 가려내기' 같지만 실제로 이 게임에서 중요한 건 '누구나 들어도 좋을' '아무에게나 말해도 되는' 진실만 말하는 거였다. 당연했다. 누구도 초면에 무거운 비밀을 털어놓지는 않으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란 걸 어린 지우조차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뺨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 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누군가 집을 떠나 변해서 돌아오는 이야기, 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하지만 그 결말을 잘 믿지는 않았다. 누군가 빛나는 재능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재능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몰입하고 주인공을 응원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라 여기지는 않았다.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 이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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