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쯤 전 내가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있을 때, 연구를 위해 미국의 어느 대학교 연구실에 두 번 연수를 간 적이 있었다. 그 연구실의 미국인 지도 교수는 배울 점도 많았고,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의 말을 전부 다 이해하지는 못했고 80% 정도만 알아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 수는 있었다. 그래서 그가 해 준 이야기를 내 블로그에 어록집으로 정리하기도 했었다. 잊어버리기엔 아까운 좋은 말들이 많아서.
어느 날인가는 내게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Don't be quixotic.
나는 'quixotic'이 무슨 뜻인지 몰라 물어보니 스펠링을 적어주며 내게 "단키아리" 얘기를 모르냐고 했다. 모른다고 했더니, 스페인의 어느 기사가 풍차를 보고 용이라고 생각해서 달려든 이야기라고 했다. 그제야 '돈 키호테'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챘다.
돈 키호테를 'Don Quixote'라고 표기하는 것도 몰랐고, 영어로는 그렇게 발음되는 줄 몰랐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확인해 보니, 그 교수가 다른 사람들보다 발음을 더 굴린 것 같다. 'Quixotic'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단어로 '퀴사틱'이라고 발음되었다.
그가 내게 그 이야기를 한 이유는 우리가 연구를 할 때 그것이 풍차인지 용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풍차를 용이라고 생각하고 달려든다고. 그래서 돈 키호테가 되지 말라는 의미로 한 얘기였다. 이 말은 지금도 내게 가장 중요한 말이 되었다.
최근에 <돈 키호테> 완역본을 윌라 오디오북으로 듣고 있다. 이 책은 오래전부터 도전하고자 했기에 이번 기회에 완독, 아니 완청하리라 마음 먹었다.
윌라 오디오북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안영옥 교수의 번역본을 기반으로 성우들이 녹음한 것인데, 여러 명의 성우가 참여하기는 했지만 한 성우가 여러 배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작품 내에 굉장히 많은 인물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캐릭터의 성격을 잘 살려서 실감 나게 연기를 했기에 몰입감이 있었다.
현재 1권을 다 듣고 2권을 듣는 중인데, 1권은 다시 전자책으로 훑어보고 있다. 삽화 또는 주석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돈 키호테가 풍차를 용으로 착각한 것이 아니라 거인으로 착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권 8장에서 돈 키호테는 평원에 있던 수십 기의 풍차를 보고 팔이 긴 거인으로 생각해서 창을 들고 달려든 것이었다.
나도 이 에피소드를 풍차를 용으로 생각하고 달려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거인이 아니라 용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 미국인 교수도 분명 'dragon'이라고 했었다. (엄밀하게는 'dragon' 보다는 'wyvern' 이겠지만)
이는 아마도 아동용 축약 버전에서 거인 대신 용으로 바꾼 것들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나도 어릴 때 <돈 키호테>를 어린이용으로 읽은 적이 있어서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외에도 파생 작품에서도 거인이 아니라 용으로 바꾼 경우가 많은데, 아무래도 더 극적이고 상징적인 효과를 위해서일 것이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돈 키호테>의 방대한 분량 가운데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돈 키호테가 종자로 삼은 산초 판사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첫 부분에 불과 두 세 페이지에만 나온다. <돈 키호테> 완역본의 분량은 열린책들 번역본 기준으로 2권 총 약 1,630페이지이다.
그럼에도 이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그 뒤로 계속 이어지는 모험담에 비해 좀 더 명확하고 간결하게 돈 키호테의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한다. 그런데 <돈 키호테>를 읽다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그가 제정신이 아닌 것은 맞지만, 그에게 공감이 되고 응원마저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 내가 그와 비슷하게 여겨져서가 아닐까? 또는 가끔은 "Be quixotic!"이 되고픈 욕망이 있어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