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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연 Nov 16. 2015

사랑에 대한 쓸쓸한 풍경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2004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영화 중 하나다. 풋풋한 청춘들이 그려내는 시리도록 아름답고 쓸쓸한 러브스토리이자 한 청춘의 삶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깊이 있고 절제된 연출과, 두 주인공 츠마부키 사토시와 이케와키 치즈루의 차분하고 섬세한 연기가 좋다. 

이 영화는 사랑과 함께 이별도 언제나 우리의 연애 속에 잠재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다시 고독해진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타나베 세이코의 원작 소설로 읽어도 아주 좋다. 



# 1. 누구에게나 특별한 첫 사랑, 절제되고 섬세한 감정

우리는 누구나 첫사랑을 통해 설레이는 사랑의 시작, 빛나는 시간들, 점점 일상속에서 시들어가는 감정, 그리고 조용하고 담당한 이별까지를 경험한다. 그 과정 속에서 처음에는 작고 초라하고 여리게만 보이던 조제가 당당하게 자신을 잃지 않고 더욱 강해지는 모습을 보면 코 끝이 시큰해질 정도다. 처음에는 못생긴 장애인 아이로 보이던 조제가 차츰 사랑스런 아이로 변해가는 과정은 실로 놀랍기만 하다. 


상처 뿐인 어린 시절부터 자존감이 강했던 아이, 오이지와 계란말이, 생선 구이, 된장국을 정말로 잘 만드는 아이, 자신을 지켜내는 법을 본능적으로 아는 강한 아이,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헌신적이고, 이별에는 한없이 쿨하게 대처하는 그녀. 나는 그녀가 사랑을 대하는 용감한 태도가 참 좋았다.   


# 2.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조금은 독특한 이 영화의 제목 속에 모든 스토리가 함축되어 있다. 조제는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 『한달 후 일년 후』에서 따온 여주인공의 이름으로, 할머니가 그녀를 위해 동네에서 주워다 준 책의 제목이다. '호랑'이는 조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같이 보겠다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동물, 즉 세상이다. 그녀에게 츠네오만 있으면 장애인으로서 자신의 처지쯤 무섭지 않은 것이다. '물고기'들은 조제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뜻한다. 츠네오로 인해 깊고 깊은 바닷속에서 헤엄쳐 나왔지만, 또 다시 혼자가 되리라는 예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안길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타자니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어.


눈 감아 봐. 뭐가 보여? 그곳이. 옛날에. 내가 있던 곳이야. 깊고 깊은. 바다 밑바닥, 난. 그곳에서 헤엄쳐 올라온 거야. 처음부터 나는 그렇게 깊은 바다 속에 혼자 있었어. 하지만 그렇게 외롭지는 않아. 처음부터 혼자였으니까.  

언젠가 자기가 없어지게 되면 미아가 된 조개 껍데기처럼...혼자서 바다 밑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되겠지 ............하지만...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아.


# 3. 담담한 이별, 그리고 홀로서기

장애인인 조제와 1년간의 동거를 하면서 조금씩 지쳐가는 대학생 츠네오. 그리고 점점 이별을 예감하는 이들. 그렇게 사랑은 조금씩 빛이 바래가고 이별은 한발짝씩 이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기억은 추억이 된다. 왜 그와 헤어졌냐고 물으면 특별한 이유를 말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가 싫어서도 아니고 미워서도 아니고 지겨워서도 아니고. 다만, 언젠가는 끝이 나게 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것이 연애의 본질이다.


헤어져도 친구로 남는 여자도 있지만 조제는 아니다.
조제를 만날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별의 이유는 여러가지였지만....아니, 사실은 하나다. 내가 도망쳤다. 

끝내 츠네오가 조제와 헤어져 나오면서 거리에서 주저앉아 통곡했지만(어린 그에게는 버거운 사랑이었다.), 끝까지 조제의 표정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제는 츠네오의 등 대신에 전동 휠체어로 혼자 장을 보고 오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비춰줄 뿐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장면이 오랫동안 뇌리에 깊이 남았다.  


"언젠가 그대는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게 될거야"
라고 베르나르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게 되겠지.
우리는 또 다시 고독하게 될 거야.
그렇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어
거기엔 또 다시 흘러가버린 1년이라는 세월이 있을 뿐인 것이지.
"그래요 알고 있어요" 라고 조제가 말했다.
- 프랑소와즈 사강 <1년 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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