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오늘 편지를 썼다. 한 가닥의 기대를 담아.. 그리고 오늘
친구여! 나의 친구여!
봄이 왔구나. 언젠가 안부 인사는 촌스럽다며 나무라던 너에게 난 봄소식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봄의 징조는 동장군이 한창 기승을 부릴 때부터 보였지. 세계는 아이스하키 퍽이 날아 지나는 평창의 차가운 빙판 위에서 한반도의 따뜻한 춘풍을 예감했었지. 남북 예술인들은 강남의 제비마냥 분단의 동토대 위로 봄소식을 가지고 날았다. 북의 예술단은 강릉과 서울에서 봄의 서곡을 연주했고, 인기 걸 그룹을 포함한 남한의 가수들은 평양시민들을 향해 “봄이 온다”고 확신에 넘쳐 예언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남북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봄이 왔음을 세상에 증명해 보였다.
TV에서 판문점 현지실황중계를 보며, 나는 너를 생각한다. 중앙 분리선을 손잡고 넘나드는 두 정상을 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18년 전의 그 여름, 유월의 햇볕을 피해 함께 물장구를 치던 그 개울가 기슭을 생각하고 있는가. 옥수수밭 가운데 기울어진 전봇대에 매달린 채 남조선 대통령의 평양방문 소식을 전하던 그 낡은 스피커를 생각하고 있는가. 동심으로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우린 알았지. 그리고 입속으로 하나의 단어를 되뇌었지. 통일! 희망으로 꿈꿀 일이 별로 없었던 그 시절의 우리에게 그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게 하는 단어였던가.
오늘 너를 기억 속에 떠올리니, 너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흘러 지난다. 몰래 남한 드라마를 보며 익힌 서울 말투를 흉내 내다 학생지도원에게 걸려 비판서를 스무 번 넘게 반복해 쓰던 고등학교 끝자락의 ‘고역’을 떠올렸다. 쉽게 승부가 나지 않는 장기를 두다 밤을 하얗게 불태운 새벽이면 어김없이 북한의 암울한 미래에 대해 나누던 우리의 우울했던 대화마저 지금은 낭만으로 기억되는구나. 대학생이랍시고, 다윈을 우리의 대화에 소환하며 그 숨 막히는 사회에 신선한 돌연변이를 꿈꾸던 너에게 생물학과 사회학도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꼬던 어느 겨울밤도 생각 키웠다. 너는 언제나 나보다 많이 생각하고 적게 행동하는 사색파였다. 내가 탈북결심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던 그 날, 너는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도 못한 수많은 우려를 쏟아내며 너의 속 깊음을 다시 한번 증명해 보였지. 결국, 우린 누구도 서로를 설득하지 못했고, 목숨이라는 유한한 재료로 각자의 삶을 실험하기로 했지.
시간은 살 같이 흘러 우리가 헤어진 지도 벌써 4년이 가까워오고, 이제 너는 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 그곳에 남았고, 나는 한 부모의 가슴에 못 박은 채 이곳에 와 있구나. 나는 여전히 생각보다는 행동을 더 많이 하며 몸으로 부딪치며 살고 있다. 덕분에 4년 전 우리가 함께 가지고 있던 의문 중 많은 것에 해답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너는 내가 살아서 남한에 도착하더라도 안기부(국정원)의 고문 정도는 각오해야 할 거라고 걱정했지. 물론 나도 각오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 하지만 그건 기우였단다. 북한의 선전을 거스르기 위해 우린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했지만, 뿌리 깊은 세뇌를 제거하기에 결코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구나. 우리의 대화 중에 미국사람들이 북한에서 욕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는 얘기가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이제 난 확실하게 답할 수 있다. 내가 직접 겪어봤기 때문이다. 북한을 탈출하여 2년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미국에 갔었다. 어린 시절에 드리운 프로파간다의 그림자는 집요한 것이더라. 아마도 그것은 뇌리가 아니라 몸의 세포에 기억된 듯했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홀로 적진에 팽개쳐진 심정이랄까. 미국인 노부부의 집에서 두 달 가까이 홈스테이를 하면서 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지. 그들의 친절한 태도, 거침없는 표현, 열려있는 마음을 보고 느끼면서, 3억을 향한 북한 2천오백만 인민의 증오가 얼마나 무근거하고 왜곡된 것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지. 그 증오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이제 너는 알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친미분자가 되었냐고? 너도 알다시피 난 내가 경험한 사실만을 얘기할 뿐이니, 판단은 네게 맡길 뿐이지. 한 나라에 대해 우리가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지표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경제 수준, 군사력, 인구, 영토의 크기 등이다. 미국에 대해 말할 때,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위의 지표들은 물론 무시할 수 없지. 하지만 정말로 나를 감탄케 했던 것은 그 나라 영토의 광대함이나 높은 국민소득, 세계최강의 군사력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들이니까. 나는 예상치 않던 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경험을 할 때, 그것이 설사 아주 작은 세부라 할지라도 감명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너는 내게 선물할 때, 종종 깜짝이라는 강력한 효과를 가미했었지. 내게 가장 큰 감명을 안겨준 것은 미국이라는 거목을 떠받치고 있는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뿌리였다.
한 가지만 실례를 들려고 한다. 내가 홈스테이하던 곳에서 학교까지는 자전거로 20분 남짓이 걸렸어. 주에 임대료로 10달러를 지불 하기로 하고 자전거를 빌려 통학을 했지. 교통비를 절약하면서도 건강도 챙길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지만, 한 가지 걱정이 있었으니 안전이었다. 미국에서 자전거는 자동차도로의 갓길로 다니게 되어있어서 옆으로 만속의 자동차들이 쌩하고 지나가며 끼쳐놓는 바람이 휙 잔등을 스칠 때 그 서늘함이란 공포 그 자체였어. 그러다보니 뒤쪽 멀리서부터 차 소리가 들리면 자전거에서 내려서 걷는 것은 기본이었고, 혹시라도 차가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것 같아서 흘끔흘끔 뒤돌아보는 것이 그만 습관이 되어버렸던 거야.
그 주제에, 혼자서 2박3일의 야심찬 자전거 여행을 단행했다. 어두워질 무렵 빈민가의 골목길을 지날 때의 섬뜩함에 머리칼을 세우기도 하고, 비싼 호텔을 피해 한인 타운에 있는 찜질방의 소파에서 잠자리를 충당하면서도 즐거웠다. 그 잊을 수 없는 여행에서 나는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의미 있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귀를 곤두세우고 뒤쪽을 힐끔거리며 자전거를 달리고 있는데 곁으로 두 명의 미국인이 다가왔다. 서로에게 “하이!”를 건네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어. 그 지역 자전거 동호회원들이었다고 생각되는 그들은 나를 배려하여 제일 안쪽에서 달릴 수 있게 해주었고, 덕분에 나는 더는 목을 비틀며 뒤쪽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어. 비록 원만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엉성한 나의 영어 실력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은 격렬한 바디랭귀지로 대신하며 한 10킬로 정도 달렸을까. 그동안 나는 그들이 전혀 뒤를 신경 쓰지 않고 달린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들에게 자동차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며 조심할 것을 부탁했지. 그러자 그들의 대답은 “이츠 오케이!” 자동차가 알아서 피한다는 거야. 내 눈엔 그들이 무모해 보였어. 어떻게 자기의 목숨을 뒤쪽에서 육박해오는 불특정 운전사에게 그토록 무책임하게 방임해둘 수 있지?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어. 문득 그들의 사고와 내 사고의 바탕이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들더군. 즉 그들 사고의 바탕에는 운전자는 교통법에 제시된 규정들을 잘 지킬 것이며, 따라서 뒤에서 달려오는 차는 나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자리 잡고 있었던 거야.
그 이후 나는 자전거를 타면서 뒤쪽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무지 애를 써보았어. 하지만 뒤쪽에서 차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 고개는 조건반사적으로 돌아가더군. 만에 하나 뒤에 오는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마약 중독자라면, 혹은 졸음에 취해 운전하고 있다면,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었단다. 내가 너에게 생사를 목숨을 건 내 결심을 터놓기까지 세월이 걸렸듯이 신뢰의 마음이 형성되는 것은 하루 이틀에 완성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어학연수 내내 뒤에서 차 소리가 나면 늘 불안했고, 내 목은 불신의 비용을 지불 하느라 비뚤어질 지경이었어. 그럴수록 미국의 신뢰 문화가 정말 부러웠다. 내가 미국의 한 도시를 보고 전체를 본 것처럼 말하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지만, 한 방울의 물에도 우주가 비낄 수 있듯이 나는 내가 본 것이 미국의 진짜 모습이라고 확신한다. 다가오는 북미 정상회담에서도 이 신뢰의 기제가 작동하길 바라는 마음이란다. 물론 북한의 신뢰 또한 동반되어야겠지. 혹시라도 이번 회담의 결과가 기대 이하이더라도 전처럼 남조선이나 미국만 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적어도 너는. 내 얘기가 네 사고의 균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속 깊은 네가 나를 배웅하며 가장 우려했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탈출 성공 이후의 삶이었지. 최서해의 “탈출기”를 함께 읽으며 이 세상의 모든 “탈출기”의 주인공들의 삶은 결국 비극이라는데, 오랜만에 의견이 합치됐던 저녁이 생각난다. 네가 떠나는 내 앞길을 걱정해줄 때 그 ‘합의’를 떠올렸었더라도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닐 테지. 지금에 와서 나는 탈출의 흥분에 들뜬 나를 걱정하던 너의 선견지명에 경의를 드린다. 솔직히 이곳에서의 나는 네가 걱정하던 것 이상의 이방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네가 선택한 삶의 실험이 훨씬 더 존엄 있는 방식일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웃긴 얘길 하나 해줄까. 탈북을 준비할 때, 난 내가 적어도 100번째 탈북자는 될 줄 알았지. 근데 정작 와보니 나는 2만 7천이 훨씬 넘은 이방인 중 한 명일 뿐이었어. 그래서 후회하냐고? 아니, 네가 너의 선택을 책임지듯 나 또한 나의 선택을 자부하고 있어. 언젠가 내가 말해줬었지. 내 팔자에 낀 역마살 얘기 말이야.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내 팔자의 역마살을 즐기는 가장 우아한 방식인지도 몰라.
네가 우리 이방인들이 작금의 남북관계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할 거라고 짐작하지 못한다면, 날 더러 네 친구라 할 수는 없을 테지. 이 집단의 감정은 아주 미묘하고, 사고의 양상은 매우 흥미로워. 네가 아무리 엉뚱한 생각을 잘 해낸다고 해도 이들 감정의 섬세함이나 사고의 변화무쌍함을 예측하긴 쉽지 않을걸.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이방인들은 고향의 부모 형제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눈물로 기뻐해. 동시에 이들은 의기소침해지기도 해. 과거의 경험을 통해 자신들이 남북관계의 진전에 껄끄러운 존재라는 자의식을 이미 확실하게 구축했거든. 이들에게 남북의 화해 국면은 마치 ‘금단의 열매’와도 같은 거지. 간절히 바라는 것이긴 하지만, 그 열매를 따기 위해 감수해야 할 고통은 에덴으로부터의 추방에 결코 짝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거든. 내 생각이 궁금하다고? 너도 짐작하겠지만, 나는 그 ‘금단의 열매’를 기어코 따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이 결코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통일이 선일지, 악일지를 분별할 수 있다면, 망각의 에덴을 벗어나는 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닐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비단 나 뿐은 아니지. 그래서 이 봄은 나에게, 우리에게 더욱 애절한 봄이라네.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며 네가 또 하고 있을 기상천외한 생각들이 참으로 궁금하군. 옛날처럼 너와 밤새며 한바탕 토론조차 해보고 싶다. 네 얘기를 잘 믿지 않았던 나와 달리 넌 내 얘기를 잘 믿어 주었지. 나는 너의 얘기들이 사변적이라는 점에서 항상 대놓고 비난했지만, 너는 나의 얘기가 내 경험에서 나온다는 점을 신뢰해 줬지. 하지만 너의 이야기는 항상 흥미로움으로 가득 차 있어서, 나는 스스로 너의 가장 훌륭한 경청자가 되었다. 지금 나는 몹시도 너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군. 그리고 이번에는 네가 어떤 비현실적인 얘길 한다 해도 모두 믿고 싶어. 오히려 그 얘기들이 좀 더 비현실적이길 바라는 마음마저 있으니까.
화해의 봄은 자연의 계절에 맞춰 찾아왔지만, 열매의 가을 또한 꼭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는 거 아니겠니. 우리가 옛 시절처럼 무릎을 마주하고 밤샘토론은 못 한다 하더라도, 이 편지의 답장을 가을이 되기 전에 기대해도 되지 않겠냐 말이야. 그래서 이 봄은 더욱이 애절한 봄이구나.
동강난 허리를 부둥켜안은 이 땅의 봄 들판 어디에선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냐고’ 울부짖었던 옛 시인의 절규가 들려오는군. 나처럼 자네의 귀가에도 그 소리가 들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 어렵게 맞이한 봄씨앗이 결실 맺을 가을을 기대하며, 그 가을에 뜻있는 자들의 역할을 기대하며, 우리가 어릴 적 즐겨 나누던 인사로 건투를 빈다.
항상 준비!
서울에서
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