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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성 Sep 26. 2021

한가위 추억

추석, 가을, 고향


 무릇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라고 한다. 추석은 그 계절 가운데 가장 풍요로운 날이다. 가난했던 시절의 명절 추억은 더 풍성하고 아련하게 기억되는 법이다. 오솔길을 따라 코스모스가 피어나던 고향의 가을, 그 사이로 제사 음식을 이고 지고 성묘 가던 고향의 추석 풍경이 아른댄다.
 
가을, 그 풍요로움 속으로 
 내게 고향의 가을은 강렬한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고갯마루에 나란히 있는 두 개의 봉분. 바다 쪽에서 번져온 석양빛이 금잔디 덮인 봉분을 비쳐 마치 불타는 것 같은 모습은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솟구치게 했다. 어린 나는 그것이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인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지, 아니면 어른들도 꼭 짚어낼 수 없는 또 다른 감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제 생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비석조차 없는 봉분이었지만 잔디가 마치 주단처럼 주변으로 펼쳐져 있어서 고개를 넘다가 숨 가빠진 길손들이나 마을 어르신들이 잠깐씩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간혹 낮술을 마시고 잔뜩 취한 주정뱅이 아저씨가 배꼽을 드러내고 코를 드렁드렁 고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럴 때면 못된 장난꾸러기 아이들은 나무 꼬챙이로 주정뱅이 아저씨의 배꼽을 쿡 찔러보고는 까르르 웃으며 마을 쪽으로 달음박질을 해댔다.  
  
 아이들에게 가을은 매혹적인 계절이었다. 벼 익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들판을 향해 코를 벌름거리는 아이들의 마음은 한껏 들뜬다. 가을 들판은 아이들을 그 풍요로운 품속으로 불러내 날이 저물도록 집으로 돌려보내지를 않았다. 봄의 곤궁함에 지치고 여름의 무더위에 짜증 났던 아이들은 그 풍요로움을 마음껏 내어준 들판으로 뛰어들어 동면을 준비하는 곰이기나 한 듯이 가을을 만끽했다. 거기에는 무르익은 오곡백과가 있었다. 숙제를 추궁하는 선생님의 매서운 회초리도 결코 가을 들판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가을은 선생님도 취하게 하는 계절이어서 그 손에 들린 회초리의 매운맛이 훨씬 약해지는 것이다. 바람에 실려 오는 들판의 향기가 짙어지고 밤새워 우는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구슬퍼질 때 가을은 바야흐로 추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추석과 죽음
 11살이 될 때까지 추석은 나에게 무척이나 맹랑한 명절이었다. 가까운 친척 중에 돌아간 분이 아무도 안 계셔서 가족과 함께 조상의 묘소를 찾아 벌초도 하고 제사를 지내는 한가위의 정취를 느껴볼 기회가 없었다. 우리가 여름 내내 해수욕을 즐겼던 백사장에서는 마을 뒷산 공동묘지가 멀리서 정면으로 바라보였다. 물속에서 나온 아이들이 모래 위에 배를 붙이고 손가락으로 산 쪽을 가리키며 누구네 할아버지는 저쪽에 있고, 누구네 할머니는 이편으로 있다고 얘기할 때마다 나는 조만간 다가올 추석을 생각하며 부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온 동네가 떡 치고 닭 잡느라 분주한 추석 전야면 나는 지붕 위에 올라 시무룩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는 우리도 제사 지낼 묘소가 좀 있었으면 하고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내가 11살 나던 해 겨울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묘소는 앞쪽으로 동해가 바라보이는 산 중턱 펑퍼짐 한 수수밭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나는 어머니가 할머니의 죽음에 꺼이꺼이 목놓아 우시는 걸 보고서야 이전 날의 내 생각이 얼마나 철없는 것이었는지 알고서는 혼자서 자책하며 슬퍼했다. 하지만 그 슬픔은 그해 추석이 오기 전에 벌써 희미하게 바래고, 대신 우리도 드디어 성묘 간다는 생각으로 나는 한껏 들떴다. 아버지와 함께 벌초하러 갔던 날 봉분에는 봄날에 옮겨 심은 잔디가 더러는 말라서 죽고 일부만 살아서 듬성듬성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올겨울만 해도 우리 집 아랫목에 누워계시던 할머니가 이제 저 초라한 흙더미 속에 잠들어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억이 막혀서 울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울기는 싫었다. 할머니 묘소에서 내려오는 오솔길 옆에서 흐느적거리던 분홍빛 코스모스가 눈에 삼삼하다.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쉬면 그 향기마저 맡을 수 있을 듯하고 그때의 슬픔마저 다시 느껴질 듯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가을이 풍요의 계절이라면 추석은 그중에 가장 풍요로운 날이다. 특히 가난한 아이들에게 추석은 가을이 가져다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속담은 아마도 옛날 어느 가난한 집 아이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말인지도 모른다. 달력에 빨간 연필로 표시해가며 하루하루 기다린 이유는 이날에야 비로소 한 달 전 어머님이 사주신 새 옷과 신발을 입고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새벽이슬을 헤치며 묘소를 다녀온 아이들은 새 신발과 새 옷에 묻은 이슬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벌써부터 뭉쳐서 장난에 여념 없다. 누구는 평소에는 꿈도 못 꾸는 머리통만 한 사과를 들고 나왔고, 누구는 제주도에서 왔다는 귤을 양쪽 주머니에 가득 넣고는 난생처음 귤을 보는 아이들에게 한 조각씩 나눠준다. 마을의 머리 큰 형들은 칼날같이 다림질한 바지에 눈처럼 하얀 셔츠들을 입고서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공연 구경을 간다고 분주하다. 아마도 동구 밖에서는 그 형들이 자전거 뒤에 앉히고 갈 누나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내게 그토록 친절한 앞집 형이 제발 시내로 데려가 달라는 내 요청을 그리도 단호하게 거절할 일은 없을 테니까.  
 
 우리도 결코 계획이 없는 건 아니다. 친구들과 양볼이 미어지도록 간식을 먹어대며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림꺽정’이나 ‘흥부전’ 같은 옛날 영화를 보는 것도 그 시절의 우리에겐 다시없는 행복이었으니. 게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진행할 ‘거사’가 한낮부터 우리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이다. 아직 해가 채 지기도 전에 혼기 찬 누나들이 끼리끼리 뭉쳐서는 한가위 달맞이하러 동산으로 오른다. 바다 쪽에서 떠오르는 보름달을 제일 먼저 보아야 좋은 신랑을 만난다고. 한참이나 지나서 동산을 향하는 또 다른 무리는 주변에서 마을들에서 모여 온 총각들이다. 저녁 어스름을 타고 도둑고양이 마냥 살금살금 그 뒤를 따르는 건 우리 조무래기들이다. 우리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선 절대로 들키지 말아야 한다. 동해에서 떠오르는 한가위 달이 아무리 크고 아름다워도 소리를 질러서는 절대로 안 된다. 어른들의 탄성이 터지고도 한참 후 달구경을 끝낸 이들이 둘씩 셋씩 흩어져 내려갈 때, 우리의 표적은 사랑에 들뜬 커플들이다. 둘만 남은 줄 아는 커플이 호젓한 달빛 아래에서 뽀뽀라도 하려면 옆 아이의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들릴 듯하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 소리를 지르면서 혼비백산한 커플을 뒤로하고 동산 아래로 도망을 친다. ‘거사’를 치르고 나면 아침에 그리도 말끔하던 옷이며 신발은 어느새 흙투성이가 된다. 하지만 다음날이면 우리 마을 아무개의 오빠와 옆 마을 아무개의 누나가 뽀뽀했다는 소문이 마을과 학교에 쫙 퍼질 것이며 우리의 무훈담은 다음 한가위까지 학교 아이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줄 것이다.  
 
 한가위가 가져다준 포만과 흥에 취해 소르르 잠들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아쉬움이 사무친다. 그 시절에 맞고 보낸 모든 명절이 그러하지만, 특히 추석은 왜 이리 짧은 것이지 하고 생각하노라면 어린 가슴에서 하품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이 폭하고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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