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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성 Nov 25. 2021

노동당  VS  장마당

북한 장마당 추억

 내 기억 속의 장마당은 마치 너무 오래되어 빛이 바래고, 구겨진 사진으로 가득 찬 사진첩 같다. 그 앨범을 한 장씩 넘기노라면 세월의 눅눅한 습기를 머금고 조금씩 퇴색되어 가는 사진들 속에서 옛적 이웃들의 희로애락이 다시금 드러난다.


사람이 모이는 곳

  내가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 동네 신작로 양쪽으로 할머니들이 나란히 앉아 간식이나 공책을 팔기 시작했다. 그런 ‘메뚜기 시장’은 기껏해야 코흘리개들의 호주머니가 목표였다. 당시에 개인이 장사하는 것은 불법이어서 기관에서 단속이라도 나오면 할머니들은 집을 싸서 골목으로 피해야만 했다. 그 모습이 마치 논에서 메뚜기들이 놀라 흩어지는 모습과 흡사해서 우리는 거기를 ‘메뚜기 시장’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내가 인민학교에 입학했을 때 여러 ‘메뚜기 시장’을 한곳에 모아 만들어진 장마당은 숨죽은 거리에서 유일하게 활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배급조차 줄 수 없는 국가가 사회주의 타령으로 쪼그라들수록 장마당은 비대해졌다. 열흘마다 열리던 기존의 ‘농민 시장’을 확장한 그곳에는 날마다 매장이 늘어났고 상품들이 많아졌으며, 그 빛깔은 화려해졌다. 그리고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나는 당시까지 장마당에 가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항상 거기는 아이들이 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옆에 앉은 단짝 친구의 화려한 샤프가 내 눈을 끌었다.  



“너 그거 어디서 났니?”

어제 장마당에서 샀는데.”  

 어머니의 경고와 대비되는 화려한 샤프는 내게 장마당을 알지 못할 위험과 매력이 어우러져 있는 이국적인 곳으로 각인시켰다. 그날 오후 나는 어머니 말씀도 까마득히 잊은 채 친구와 장마당의 인파 속에 묻혀 있었다. 장마당은 무엇보다 냄새의 천국이었다. ‘고양이 뿔만 빼고 다 있다’는 장마당에는 평소에 볼 수 없는 물건들과 집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는 음식들 천지였다. 노랗게 잘 굽혀진 꽈배기에서 풍겨오는 냄새가 8살 나에게 하나 덥석 집어먹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켰다면, 용도도 모를 번쩍이는 중국제 전자 제품들에서 풍겨오는 플라스틱 냄새는 아직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을 느끼게 해주었다. 옆 사람과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는 고기 장수들이며 손님을 앞에 두고 경쟁하듯 호객하다가 급기야 다투기까지 하는 신발 장수들. “도둑놈 잡아라!” 그 다급한 외침과 순대 훔친 내 또래의 꽃제비 아이, 아이를 쫓는 아줌마의 필사적인 눈빛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은 수많은 고아를 양산했고, 장마당은 부모도, 나라도 지켜주지 못한 그 꽃제비 아이들의 거처가 되어주었다. 장마당은 옆집 누나도 불러냈다. 국가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장마당에서 장사를 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19살이었던 누나는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파마한 아줌마 스타일로 바꾸고 판매대에 앉았다. 나는 그런 누나를 볼 때마다 놀려댔지만, 내심 누나의 멋진 머릿결에 더는 장난 칠 수 없다는 사실이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다. 나는 이른바 ‘장마당 세대’였다.  

 

돈이 모이는 곳

  장마당의 영향력은 학교에까지 미쳤다. 학급에도 엄마가 장사를 시작한 애들이 두세 명 생겼다. 그런 애들에게서는 뭐랄까, 돈 냄새가 났다. 그 애들이 입고 노는 옷 색깔은 갈수록 화려해졌고, 옷에 새겨진 영어 알파벳 개수도 늘어났다. 처음에 선생님은 그런 애들을 자본주의 물이 들었다며 질타했지만, 학부형 회의 때마다 그 애들 부모님이 교탁 뒤쪽에서 꾸러미나 봉투를 슬쩍 건넬 때면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다. 그 친구들 집으로 놀러 갈 때마다 친구 아빠가 차려주는 밥상에는 반찬의 가지 수가 늘었고 종류도 자주 바뀌었다. 인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 친구 집은 단칸짜리 방에서 세 칸 방으로 늘었고 그중 하나는 우리가 일본제 닌텐도로 마리오 게임을 하며 놀았고, 다른 방의 친구 아빠는 농짝만 한 파나소닉 CD 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으며 아사히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건전지 배터리나 잡화 판매로 시작한 친구 엄마의 판매대 면적은 우리가 중학교에 갈 때쯤 3배로 넓어졌다. 장마당은 그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었고 그런 사람들은 다시 장마당을 더 커지게 했다. 엉성했던 장마당의 널빤지 울타리는 미끈한 벽돌담으로 대체되었고, 진흙으로 질척이던 바닥은 콘크리트로 포장되었다. 강둑까지 세배는 더 확장된 장마당에는 파란색 방수포로 천장이 씌워져 비 맞을 걱정이 사라졌다. 그 지붕 아래로 사람들의 손과 손을 거쳐 도시의 돈이 모이고 모였다. 겁에 질린 듯 초조함이 흐르던 모습들은 사라지고 장사꾼들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에서는 개기름과 함께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소문이 모이는 곳

 사람과 돈이 모이는 곳에 소문이 모이는 법이다. 장마당은 한마디로 북한의 소문 제조공장이었다. 중앙방송이 뉴스를 만들 때 장마당에는 소문이 있었고 국가가 정책을 만들면 장마당은 대책을 만들었다. 국가의 서슬푸른 정책도 장마당의 유연한 대책 앞에 속수무책이었고 중앙방송의 계획적인 뉴스는 장마당의 산발적인 소문에 빛을 잃었다. 장마당이 생산하는 소문은 무엇보다 재밌었다. 어떤 정보라도 일단 장마당을 거쳐 나오면 아주 그럴듯한 흥미로운 소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소문에는 그 장마당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염원이 가미된다. 예를 들어 중앙방송에서 남조선 대통령의 ‘비핵, 개방, 3,000’이라는 구상에 대해 헐뜯었을 때, 장마당에서는 ‘비핵, 개방, 3,000’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 어떤 사람은 ‘비밀리에 핵을 개발하는 삼천 가지 계획’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이는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는 대가로 세대마다 3,000달러씩 받는 거’라 말한다. 결국 이런 종류의 토론은 하나의 종착점에서 합의를 보게 되는데 ‘핵을 비밀리에만 개발한다는 조건으로 국경을 개방하면 모든 인민은 3,000불씩 받게 된다’는 해석으로 결말이 난다. 모두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소문을 퍼뜨린다. 아마도 당시 한국 대통령은 남한 국민보다는 북한 주민에게 더 인기가 많았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장마당의 소문은 이상하게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아무리 허황한 이야기라도 사람들은 장마당을 둘러싸고 퍼지는 소문에 귀를 기울였고 그것을 옹호하는 논리를 개발해서라도 믿고 싶어 했다. 국가 입장에서는 이런 장마당이 눈에 든 가시가 아닐 수 없었고 어떻게든 없애려고 애를 쓰지만, 장마당 위로 나부끼는 자본주의의 깃발은 전혀 내려질 기세가 아니었다. 2009년 북한에서 화폐개혁이 단행되었을 때, 2011년 김정은이 집권했을 때도 장마당은 무수한 소문들을 만들어내며 지친 주민들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장마당은 많은 것들을 바꾸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친구 엄마는 시내에 커다란 전자제품상점을 차렸다. 어머니는 장마당에서 돌아오는 엄마를 마중해 오는 뒷집 꼬마가 착하다며 칭찬하셨고, 학교에는 더 이상 ‘자본주의 물이 든’ 학생들의 옷차림을 비난하는 선생님이 남지 않았다. 장마당에서 돈을 많이 번 옆집 누나는 대도시로 시집갔다. 아기를 업고 본가에 나들이온 누나의 머릿결은 다시 옛날처럼 다시 길어져서 등 뒤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 기억 속에서 장마당은 이제 빛바랜 사진첩이 되었지만, 그곳 사람들에게 장마당은 아직도 희로애락이 뒤엉킨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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