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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성 Feb 09. 2021

봄의 외침

옛 봄의 냄새와 색과 맛, 그리고 촉감

 입춘 고개를 넘어온 바람이 제법 봄 냄새를 풍기는 날씨다. 살갗에 닿는 바람은 아직 차지만 그렇다고 걷어 올린 팔소매를 내려야 할 정도는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마를 간질이 봄바람이 데려다그곳에서 만나보는 고향의 봄, 그 기억은 지난밤 꿈처럼 아련하다.  




 봄은 항상 냄새를 앞세우고 왔다. 마을 앞 개울이 눈석임 물에 불어날 때면 해묵은 송진 냄새 같기도 하고 비에 젖은 동네 개들이 풍겨대던 비린내 같기도 한 봄 냄새가 빼꼼히 열린 우리 집 창문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런 날이면 할머니는 서둘러 창문 닫기에 바빴지만 나는 그 속에서 강 건너편 냇둑에 피어나는 버들강아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약동하는 생명의 숨결이 산으로, 들로, 바다로 아이들을 불러냈다. 뒷산은 양지쪽에서부터 피어나기 시작한 진달래꽃이 뿜어내는 분홍빛 열정으로 불타는 듯했고, 그 핏빛 그림자는 온 동네를 감싸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몸 가벼운 아이들은 산으로 뛰어올랐다. 진달래꽃을 삼켜 버린 아이들의 주린 창자는 봄의 열정에 취해 배고픔을 잊었다. 풀리기 시작한 논물의 웅덩이마다에서 붕어 떼가 바글거렸다.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붕어를 건져내는 아이들의 파리한 입술에는 기쁨이 넘실거렸다.


 동네 누나들 따라 냉이며 달래를 캐러 가는 날은 봄을 맛보는 날이다. 달래 잎 주위 땅을 끝이 뭉툭한 칼로 푹 찍어 한 바퀴 휙 돌려서 하얀 뿌리를 파내는 재미는 직접 해본 사람이 아니고는 결코 알 도리가 없다. 갓 캐낸 달래에 묻은 흙을 바지춤에 쓱쓱 문대고는 고추장을 듬뿍 묻혀 주먹밥에 곁들여 먹는 맛은 또 어떤가. 향긋한 달래 향이 입안에서 꽉 차오르는 그 상큼함이 다름 아닌 봄의 맛이다. 봄볕이 목덜미를 따사로이 비벼댄다든지, 종다리가 방울 소리로 내 귀를 간지럽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다른 친구들이 바구니에 넘쳐나도록 봄의 선물을 캐어내는 동안 내 것은 절반도 차지 못했다. 그런 날이면 누나들은 자기들 몫에서 한 줌씩 덜어 내 바구니를 채워줬다.


 봄은 한편 굶주린 아이들에게 야속한 계절이기도 했다. 소나무에 봄물이 오르기 시작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송기 벗기러 갔다. 소나무 겉껍질과 나무 속살 사이에 미끈거리는 하얀 얇은 막이 있는데 이것이 송기다. 그것을 잿물에 며칠이고 우려내면 식감이 괜찮아서 봄철 대용 식량으로 이용했다. 봄이 깊어갈수록 점점 껍질 벗긴 소나무들이 늘었고 인간들은 점점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사람들은 나무가 완전히 말라죽지 않도록 한 뼘 너비의 껍질을 남겨두는 것은 잊지 않았다. 물론 그중에는 껍질을 완전히 벗겨 죽어버린 나무도 많았다.


 그렇게 나무의 목숨 혹은 깊은 상처는 주로 옥수수 가루와 함께 짓이겨져 송기떡이 되었고 아이들은 그것으로 허기를 달랬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며칠이고 송기떡만 먹으면 이내 몸이 거부반응을 보인다. 게다가 부족한 옥수수 가루 대신 송기 량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면 떡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이 즈음이면 아침마다 아이들의 막힌 항문을 꼬챙이로 파내려는 엄마들과 기어이 거부하려는 아이들의 실랑이가 동네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목구멍이 차마 거부하지 못한 거친 음식을 뒷구멍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아득한 보릿고개를 기다리는 아낙네들의 한숨은 깊어도 봄 장난에 심취한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골목 간에 드높았다. 봄바람이 겨우내 얼었다 녹은 땅을 말리기 시작하면 비로소 아이들의 봄철 놀이가 시작되었다.


 그 시절 나는 알아주는 개구쟁이였다. 소학교로 올라간 해 봄에는 특히 유별났었다. 가방에 책 보다 딱지를 더 많이 채우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큰길 한복판에서 친구와 딱지치기가 시작됐었다. 빙 둘러서서 잘한다, 잘한다 소리치며 구경하는 아이들 속에서 딱지를 치다 보면 신나기 마련. 입고 있던 패딩을 길가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딱지에 열중했다. 그날따라 유난히도 딱지가 잘 돼서 친구 것까지 모두 따서는 가방에 가득 채우고 해가 기울어 집에 왔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패딩을 두고 온 것을 기억해내고 정신없이 달려가 보았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학교에 입학한다고 어머니가 사주신 새 패딩을 그렇게 며칠 만에 잃어버렸다. 


 구슬치기와 망까기(비석 치기)는 남자아이들이 인기놀이였고 여자애들은 주로 줄넘기나 공기놀이를 했다. 남자애들 찜 쪄 먹게 구슬을 잘 치는 세찬 여자애와 여자애들 뺨치는 공기놀이 실력을 가진 얌전한 남자애가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었다.

 

 구슬치기는 베어링을 갖고 했는데, 직경 1.5Cm 정도 적당한 크기를 가장 높이 쳐주었다. 여자애들은 바닷가 조약돌을 옷자락에 한가득 담아다 공깃돌로 썼다. 놀이에 싫증난 남자애들은 줄넘기하는 고무줄을 끊어놓거나 공깃돌을 훔쳐 달아나기 일쑤였다. 마을 삼거리 전선줄에는 고약한 녀석들이 걸쳐놓은 고무줄이 항상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구슬치기 하는 구멍에 물을 부어버리는 식으로 장난꾸러기 남자애들에게 복수해댔다. 이따금 지나친 심술을 부리다가 여자애들 오빠나 삼촌에게 걸려든 녀석들이 벌벌 떨며 두 손을 하늘로 높이 들도 노래를 부르거나 팔목이 뒤틀릴 때까지 푸시 업 하는 걸 보면서 키득키득 웃어주는 것도 여자애들에게는 꽤 달콤한 복수였다.


 놀이 중에 제일 신나는 건 말뚝박기였다. 두부 집 골목은 동네 아이들의 광장과도 같은 곳이어서 늦은 오후가 지나 저녁녘이 가까워 오면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하나 둘 이곳에 모인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방을 울타리에 털썩 걸쳐놓는 애들도 있고, 달래 바구니를 구석에 밀어놓고 놀이에 뛰어드는 아이도 있다. 심부름 가던 길이라면서도 아까부터 여기 있는 애도 있다.


 애들이 좀 모이면 습관처럼 시작되는 것이 말뚝박기 놀이다. 성별과 나이에 관계없이 마을 한가운데로 가로질러간 길을 기준으로 두 편으로 나눈다. 너무 어리고 연약한 친구들 빼고는 모두가 참여한다. 팀 중에서 가장 연약한 애가 주로 말뚝이 되어 팀별로 전술을 짠다. 신통한 전술이랄 것도 없지만 어쨌든 제일 큰 형이나 누나가 열심히 말하고 다른 애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자못 근엄하기까지 하다. 


 아이들의 만만찮은 승벽심이 두부 집 울타리를 세 번이나 무너뜨렸다. 아이들을 쫓아내다 지쳐버린 두부 집 할머니가 네 번째로 만든 울타리는 녹슨 철길 레일 기둥이었고 동네 아저씨들이 모두 함께 도와서 만들었다. 말할 것없이 튼튼해서 내가 대학교로 떠나는 날까지도 울타리는 수직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한 번 시작된 놀이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저녁을 다 지으신 부모님들에게 손목을 잡혀 끌려 들어가기 전에는 결코 스스로 멈추는 법이 없다. 그때쯤에야 아이들 눈에는 어두워진 하늘치솟은 굴뚝을 통해 솟구치는 하얀 연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 집 무쇠 솥에서 누룽지를 긁어대는 소리도 다. 그 고소한 냄새마저 맡을 수 있다. 누구는 깜빡했던 심부름 생각에 쏜살 같이 달리고 또 누구는 바구니 밖으로 흘러나온 냉이를 바삐 주어 담을 때, 나는 아직 작도 못한 숙제를 떠올리며 집으로 달음박질쳤다.


풍족하진 않았어도 건강했고, 굶주렸어도 활기찬 계절이었다. 


 한 해, 또 한 해 봄을 맞고 보낼수록 그 시절 그 봄의 냄새와 색깔, 맛과 촉감은 더 뚜렷하고 강렬해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새봄이 옛 봄을 부르는 외침은 유난히도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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