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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성 Apr 10. 2021

길동이는 어디로 갔나

어릴 적 북한 영화(관) 추억

고향 영화관은 읍에서 제일 큰 건물이었다. 어린 나에게 무서울 정도로 큰 그 건물에 처음으로 들어가 본 것은 5살 무렵에 어머니와 함께였다.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차갑고 딱딱한 나무의자의 촉감과 앞자리에 앉은 여자의 머리에 매달려 있던 분홍색 머리핀의 이미지만 선명히 남아있다. 나는 여름철 영화관에서 맡을 수 있었던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나를 조금 무섭게 만들던 어둠이 좋았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 조명이 꺼지는 때였다. 언제 조명이 꺼질지 숨을 참고 기다리다가 불이 꺼지는 순간 귀전으로 소름이 확 끼치고 지나가는 느낌은 정말 짜릿한 쾌감을 안겨주었다.  

구글에서 찾은 가장 비슷한 느낌의 이미지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설음은 옛 추억 묻은 영화관에서 "홍길동"을 다시 못 보는 슬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리라.


 어릴 적 제일 좋아했던 영화는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홍길동"이었다. 그때는 영화에서 나오는 액션에 매료됐다. 영화가 끝나면 아이들과 뒷산 공터에 올라 입으로 휙휙 소리를 내가며 앞구르기며 발차기를 해댔다. 영화관에서 자주 상영했던 영화들 중에는 "붉은 단풍잎"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남한에서 성시백 사건으로 알려진 실화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였다. 영화의 등장인물 중에 남한에서 견결한 반공검사로 알려진 오제도가 등장하는 데 그 시절에 내가 현실과 가상을 통틀어 가장 싫어하던 캐릭터였다. 당시에 영화표 한 장에 2원이었다. 얼음과자(아이스케키) 하나에 50전이었는데 아이들은 여름철의 햇볕 아래서 영화를 볼지 얼음과자를 사 먹을지 갈등해야 했다. 만약 영화 시간까지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는 날이면 영락없이 영화표는 아이스케키가 되어 아이들의 뱃속에 녹아버리곤 했다.  
 
 그런 날이면 아이들은 매표 아저씨의 눈을 피해 게릴라를 펼쳤다. 영화관이 개표를 하는 순간이면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줄을 서서 들어가는 법이 없이 단번에 무리 지어 밀려들어갔다. 만약 운이 좋으면 그 무리 속에 머리를 숙이고 끼어있으면 저절로 밀려들어갔다. 운이 나쁜 날이면 표를 받는 아저씨에게 얻어 맞고 쫓겨나야 했다. 무용담은 그럴 때마다 만들어졌다. 먼저 들어간 아이들이 옷을 벗어 소매끼리 묶어서는 영화관 뒤쪽 2층 떼창으로 내리 드리워주밖에 남은 애들은 그걸 타고 하나씩 올라갔다. 2층이라지만 가 워낙에 높아서 거의 3층 높이였다. 아이들은 겁도 없이 기어올라갔고 그러다 어느 애 옷의 변변찮은 겨드랑이가 찢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다. 그 시절에는 소매가 늘어난 옷 때문에 부모님한테 꾸지람 듣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항상 성공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허탕치고 돌아가는 날도 많았다.  


새 영화가 시작될 쯤이면 우리는 어김없이 영화관 앞에서 포스터를 그리는 아저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저씨의 붓놀림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그 붓끝에서 탄생하는 주인공은 영화 속의 모습과 사진처럼 닮아 있었고 일필휘지로 써내려 가는 영화 제목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했다. 영화 필름은 도에서 내려다 상영하고 다시 올려가곤 했는데 보통 한 영화를 3일 간 반복해서 돌렸다. 만약 첫 이틀에 보지 못하면 삼일째는 무조건 성공해야만 했다. 몰래 들어가는 데 성공해도 빈자리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정 앉을자리가 없으면 아이들은 무대 위로 올라가 앉았다. 보통의 영화관은 공연이나 행사를 함께 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 무대가 있었다. 아이들 뒤통수가 영사막에 나타난 모습은 마치 목표물 같았다. 앉았다고 절대로 방심하면 안 된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도 매표 아저씨가 아이들을 잡으러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만약 붙잡히는 날에는 흠씬 두들겨 맞는 건 기본이고 빈방에 갇힐 수도 있다. 영화관 3층의 끝방에는 공연 같은 걸 할 때 쓰는 소품들을 보관했는데 워낙에 어둡고 음침해서 우리는 귀신 방이라고 불렀다. 한 번은 아저씨가 몰래 영화보다 붙잡힌 한 아이를 거기에 가둬두고 밖으로 문을 잠가버렸는데 그만 까먹고 퇴근해 버렸다. 집에 가서야 생각이 나서 불이 나게 달려와 봤더니 그 아이는 쿨쿨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고. 영화 보는 것보다 아저씨와 숨바꼭질을 더 즐기는 애들도 몇 있었다. 그런 애들은 영화는 안 보고 일부러 아저씨 눈 앞에 나타났다가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려댔다. 한 아이는 그렇게 달아나다 아저씨에게 거의 잡히게 되자 2층에서 객석으로 뛰어내렸다. 즉시 다리가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갔다. 아저씨는 너무나 놀라 그 이후로 애들이 2층 쪽으로 가면 더 쫓지 않았다.  
 
 아저씨가 마냥 우리를 귀찮게 하는 사람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냥 당신의 일을 했을 뿐이었다. 전기 사정이 안 좋아 영화 도중에 정전이 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한 번 정전이 되면 언제 전기가 다시 올진 누구도 모른다. 바쁜 어른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떠나가지만 하릴없는 아이들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죽치고 기다린다. 아저씨가 아무리 퇴근하자고 사정해도 막무가내다. 냉난방 시이 없는 영화관은 여름에는 찜통이고 겨울에는 말 그대로 냉장고다. 겨울에 한 시간씩 전기를 기다리다 보면 아이들이 시린 발을 구르는 소리로 영화관이 가득 채워진다. 그럴 때면 아저씨는 아이 셋쯤은 넉근히 들어갈 커다란 철제 석유통으로 만든 드럼통 난로에 숯을 가득 담아 영화관 한가운데 들여놔 준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 주위로 빙 둘러서서 불을 쬔다. 이쯤 되면 아이들 중에 이미 영화 내용을 알고 있는 친구가 멈춘 장면부터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기 시작한다. 거기까지면 그래도 괜찮은 데 어떤 녀석은 구라를 쳐대기 시작한다. 어떤 때는 지어내는 이야기가 너무나 그럴듯해서 오히려 실제 영화보다 더 재밌는 경우도 있다.
 
 영화관에서 꼭 영화만 봤던 것은 아니다. 해마다 1월 1일이 다가오면 '설맞이 공연'을 준비해야 했는데 벌써 11월부터는 공연 연습을 해야 했다. 지역의 모든 학교 학생들이 모두 모여 진행하는 축제 같은 분위기여서 마지막 리허설 단계에서는 영화관에서 함께 모여했다. 그럴 때면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니는 형, 누나들 사이에서 커플들이 많이 생겼고 나 같은 꼬맹이들은 연애편지 나르기에 바빴다. 형들은 억지로 윽박질렀고 누나들은 껌이나 사탕으로 얼려서 심부름을 시켰다. 우리는 중간에서 항상 연애편지를 펼쳐서는 키득키득 읽으면서 연애의 문법을 익혔다.  
 
 "홍길동"의 액션 씬보다는 그가 찾아 떠난 새로운 나라가 어디일지 더 궁금해질 무렵 나는 상급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열두 살 되던 해였다. 썩 훗날 고향 영화관을 다시 찾았을 때, 그토록 커 보이던 건물이 그렇게 작고 초라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움은 내 기억을 먹고 점점 더 커져만 가는데 다시 고향을 찾는 날 그 건물은 더 작아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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