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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섬광

맥주잔의 거품이 꺼지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by 경계선

추석 때는 싸워야 제맛이지. 원래 그런 거야.

자기 한 몸 건사하지 못하는 오빠 때문에 지쳐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인데, 올 연말에 드디어 모든 빚을 청산해.

직장 생활한 지 십 년이 넘었는데 이제 통장에 700만 원 있어. 이게 맞냐?

엄마 빚을 그렇게 오래 갚아주고 있었어?

그러면 어떡해. 엄마 몸도 안 좋고 그런데.

이제 그만 독립해라. 집에 그만해.


네가 잘못한 건 없지만 그냥 내 말대로 해라.

정말 내가 말한 그대로 이야기했어. "네가 맞지만, 내 말대로 해라."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조직에서 왕따가 되어가고 있어.

내가 하는 방식이 맞지만 다수는 그렇게 하지 않으니 그냥 네가 참아라.

이게 지금 최고 책임자가 할 소리야?

이 조직이 말이 되는 조직이야?


힘이 빠진 손아귀에 쥐어진 맥주잔의 거품이 다 꺼지고.

핸드폰 알람이 울려 대화에서 빠져나온다.

맥주잔을 내려놓은 나의 표정이 한참 동안 더 급격히 어두웠지 싶다.

다음 글이 기다려지던 최규영 작가의 무기한 활동 중단이 아쉬웠던 시간을 기억해 냈다.

글을 다시 올릴 날을 천천히 기다리려 지나간 그의 글을 간헐적으로 찾아 읽었다.

브런치에서 늦게 찾은 사람,

발버둥 치며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사람,

감각의 촉수가 예민해 생활이 어떨까 궁금했던 사람,

시퍼렇다가 시뻘건 단어들의 감상들과 감각이 만져질 때마다

다음 글이 궁금했는데.

라이킷 몇 번 못 눌렀는데.

그가 소천했다는 공지글이 올라왔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의 계정으로 들어와,

그에 대한 소식을 쓴 그 글이,

나는 아직도 그저 촌극이길 바라게 된다.


맥주잔의 거품 꺼지듯이 시무룩해지는 일상의 자잘한 고통들이 나을까.

저 고통들을 뒤로하고 이제 이 모든 것들을 그만두는 것이 나을까.


생의 의지는 오르락내리락하는 호르몬 같은데.

이 생활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 내 의지가 맞을까,

논쟁과 불편과 생활의 고통과 희열과 옳고 그름과

생의 주제는 차고 넘치는데

나는 누군가의 죽음과 고통 그 위에서 겨우 살아남았다고 안도하는 미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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