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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플러스 인생 Jan 02. 2022

세 번째 이야기, 노숙 자경 (2)

"노씨 집안에 미치광이가 태어났구나"

-172년, 서주 임회군 동성현.


노숙이 태어난 건 서주의 부유한 호족 집안이었습니다. 임회군 동성현은 하비국에 속해 있었다고 하는데, 여포가 농성했고 나중에 관우가 지켰던 바로 그 하비 출신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나옵니다. 할머니,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모양인데,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남아있지 않은 걸 보면 집안사람들이 특별히 벼슬을 하거나 중앙 정계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은 아니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그늘도 없이, 대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일까? 노숙은 외모가 남달랐고, 큰 일을 하겠다는 포부도 뚜렷했다고 나옵니다. 일찌감치 나라가 혼란해졌다고 생각하고 지역의 젊은이들을 모아 함께 무술을 연마하며 사실상 이들을 자신의 사병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랬다가 집안 어른들에게 이런 평가를 듣습니다. 


"노씨 집이 대대로 쇠퇴하더니 이 미치광이를 낳았구나!"


비슷한 이야기를 친척 어른에게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유비입니다. 동네 나무를 보며 "나는 이렇게 생긴 천자의 수레를 탈 테다" 즉, 황제가 되겠다는 말을 내뱉다가 친척 어른에게 "가문을 멸망시킬 놈"이라는 욕을 듣지요. 


그런데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무장을 갖추는 것은 삼국지 시대 많은 군벌들이 벌인 일입니다. 노숙은 왜 특별히 욕을 더 먹은 것일까? 


어쩌면 노숙이 하고자 했다는 '큰 일'이, 바로 무너지는 한나라에 대한 반역의 의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다만 이 부분의 해석이 인터넷 삼국지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인 '파성넷'의 번역이 조금 다릅니다. 거기에는 집안 어른들이 "이렇듯 기백이 우리들과는 다른 아이가 태어났구나"라고 말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부정적 뉘앙스가 긍정적 뉘앙스로 반전됩니다. 


어느 해석이 맞는지 한자를 모르는 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집안 어른들과 달랐다는 노숙의 면모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노숙이 재물을 풀고, 땅을 공개적으로 판매하며 가난한 이들을 구제해 고향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는 대목입니다. 괜히 지역의 젊은이들이 노숙을 따른 게 아니라는 거죠. 지역 유지인 호족에게 있어 땅을 팔고 재산을 푸는 행위는 민심을 얻는 일일지는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지역 내 경제적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일입니다. 노숙은 지역에 뿌리내린 호족으로서의 삶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추구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가 돈과 땅을 팔아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노숙, 주유에게 전재산의 반을 주다


노숙이 재산을 팔아 사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당시 서주와 근접한 양주 여강군에서 이름난 가문이 바로 주씨 가문이었습니다. 여강 주씨의 대표주자, 주유는 당시 불과 20대의 나이였음에도, 크게 위세를 떨치던 원술이 흠모해서 자기 부하로 삼고 싶어 했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주유는 원술의 한계를 꿰뚫어 봅니다. 주유 자신도 한나라의 몰락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뒤를 이을 사람이 원술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죠. 그래서 주유는 원술에게 자신은 고향인 여강군으로 돌아가 거소현이라는 곳의 관리나 맡겠다고 하고 중원에서 한 발 물러섭니다. 원술이 주유의 결정에 동의했다고 하는 걸 보면 원술도 주유를 함부로 강제할 순 없었던 걸로 보입니다. 


자, 거소현으로 온 주유는 이때쯤 강동에서 대활약을 준비하고 있던 친구 손책에게로 합류해 큰 일을 도모할 준비를 합니다. 이때가 198년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주유는 군자금을 끌어모으기 위해 주변의 부호들을 찾아다니는데, 이때 주유가 노숙의 명성을 듣고 그를 방문합니다. 


분명 서주의 호족이었던 노숙이 왜 198년에는 양주에 와 있는 것일까? 


이는 서주대학살의 나비효과로 보입니다. 


노숙이 20대에 접어들 무렵, 고향인 서주에 대난리가 일어납니다. <미축 자중> 편에서 다룬 적이 있는 조조의 서주대학살입니다. 193년, 194년에 두 차례에 걸쳐 대살육이 있었다고 하니, 노숙의 나이 22, 23세쯤입니다. 


노숙은 가족들에게 "이 동네에 도적들이 난리를 치고 있으니, 회수와 사수 사이에는 자손을 남길 땅이 없다"라며 장강 쪽으로 남하하자고 권합니다. 회수와 사수 사이는 바로 노숙 등이 살던 하비와 광릉쯤인데, 유비군이 거지꼴이 돼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극을 겪다가 미축에게 구원받은 땅이 바로 이 지역이었습니다. 서주대학살 이후에 도적들이 창궐하며 노숙이 살던 곳 주변도 처참해졌던 모양입니다. 


노숙은 과감하게 이 지역을 떠나 새로운 곳에 자리 잡기로 한 것이죠. 지역의 유력한 인사가 떠나려고 하자, 서주의 기병대가 쫓아와 이를 막으려고 하는데요. 노숙이 "천하가 혼란해져 나를 데려가 봤자 상을 받지도 못하고 추격해봤자 나를 처벌하지도 못할 텐데 어찌 나를 막느냐?"며 활로 방패를 뚫어 보이자 추격대가 탄복하며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호걸이군요, 노숙.


아무튼 그렇게 양주에 와 있던 노숙에게 주유가 찾아온 것입니다. 


큰 일을 하기 위해 군자금을 달라는 주유에게, 노숙은 곡식 3천 석이 들어 있는 곳간 두 곳 중 한 곳을 통째로 줘버립니다. 전 재산의 반을 넘겨준 것이죠. 주유는 노숙의 배포에 감탄하며 그와 두터운 친구 관계를 맺습니다. 


여기서 '친구관계'는 단순한 우정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주유를 통해 노숙이 정치계에 데뷔했다는 뜻입니다. 주유는 당대에 명성을 떨치던 명사였고, 그 명사 집단에 들어가야만 정치를 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노숙은 평소 지역에서 차근차근 쌓아오던 명성을 기반으로 주유를 만났고, 주유에게 통 큰 배팅을 해 보이며 재산만 있는 호족에서 명성을 떨치는 명사로 거듭나게 된 겁니다. 


노숙이 재산을 팔아 사고 싶었던 것은, 바로 정치가라는 자격이었습니다. 


이것은 큰 재산을 헐어가며 유비의 정치를 후원하고자 했던 미축과는 또 다른 행보입니다. 미축은 자기 비전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투입해 지원하고자 하는 '유비의 비전'을 만났을 뿐이죠. 심지어 중앙에서 내려주는 벼슬까지 버리면서 '주군' 유비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노숙은 자기의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군주'에게 자기 재산을 배팅한 게 아니라 자기를 또 한 명의 유력 정치인으로 만들어 줄 힘이 있는 '정치인' 주유에게 배팅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정치가가 돼서 스스로의 비전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결국 노숙은 정치를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것도 노숙, 자신의 정치를요. 


이제 그가 구하려는 것은, 자신의 재산을 받아먹을 야심가가 아닌, 자신의 비전을 실현해 줄 '대리인'으로서의 군주였습니다. 


노씨 집안의 미치광이, 노숙이 당당한 난세의 정치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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