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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플러스 인생 Feb 05. 2022

(6) "진중권씨는 ’예형‘의 길을 가고자 하십니까"

2020년 10월 13일 민주당 박진영 상근부대변인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0. 오늘은 조금 예전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합니다. 잘못된 삼국지 비유의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1. 원본기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893643#home




2. 어떤 말을 했을까요?


논평에서 민주당 박진영 상근부대변인은 진 전 교수가 조정래 작가의 발언을 비판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진중권씨의 조롱이 도를 넘어서 이제는 광기에 이른 듯하다”고 비난했다...(중략)...박 부대변인은 “품격은 기대하지도 않겠다”면서 “예형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리 하십시오”라고 논평을 끝맺었다. / 이상 기사 본문




3.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예형은 자가 정평으로, 청주 출신의 선비입니다. 삼국지에서 조조가 여포를 무찌르고 중원의 자잘한 제후들을 전부 제압한 198년 갑작스레 등장하죠.


조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온 예형은 조조 정권의 부당성을 정면으로 거론합니다. 한 제국에 충성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황제를 억류하고 있으니 너희야말로 천하의 역적이 따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조조는 당장 예형을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유학계의 거두이자 공자의 후손인 공융이 예형 편을 드는 바람에 그를 죽이지 못합니다. 조조에겐 아직 당대 명사집단의 주류를 이루는 유학자들의 지지가 필요했습니다. 조조는 하북의 강자 원소와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조가 천자의 권위를 빌려 한나라의 충신을 자임하고 있었던데 반해, 원소는 동탁이 세운 천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조조가 천자에게 충성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정치를 하고 있다고 공격했습니다. 조조 측이 원소 측을 "내 명령이 곧 천자의 명령이다"라고 공격하면, 원소 측에선 "너야말로 국정을 농단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격하는 식이었죠.


그런데 예형은 조조를 면전에다 대고 역적이라고 욕하고, 조조의 신하들을 전부 쓰레기 취급해버립니다. 순욱, 곽가, 하후돈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묘지기, 얼굴만 번지르르한 놈, 개백정 등으로 취급하는데 다들 속이 터져 미치려고 하는 대목이 <삼국지연의>에 나옵니다. 


이게 단순히 기분이 나쁜 문제였을까요? 아닙니다. 황제의 외척인 동승이 천자의 밀서를 받들어 유비와 함께 조조 척살을 도모하다 적발돼 황제의 아내인 귀비를 포함해 3족이 몰살된 사건이 불과 2년 뒤인 서기 200년입니다. 이 때는 아직 조조가 한 제국의 중심부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방증입니다. 


원소의 세력은 강대했습니다. 결전을 앞둔 시점에는 조조의 심정은 거의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해도 무방합니다. 나중에 조조가 원소를 무찌른 뒤 문서를 뒤져보자 원소가 이길 줄 알고 내통했던 내부자들 문건이 수두룩하게 나왔습니다. 조조는 이걸 불문에 부치기 위해 문서를 개봉하지 않고 모두 태워버리라고 명령합니다. "나도 마음이 흔들렸는데 이들이라고 별 수 있었겠는가"는 고백을 하며.  


조조 정권은 더 강한 세력을 오직 명분으로 이겨야 했습니다. 그만큼 지식인 집단의 이탈을 불러 올 수도 있는 조조=역적 프레임은 조조가 가장 아프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놀라운 암기력과 통찰력으로 당대 유학자들에게 실력을 인정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다만 인성이 별로였기에 대단한 지위를 얻지 못했을 따름이죠. 그런 그가 조조 집단 앞에서 선보인 현란한 퍼포먼스는 곧바로 전국으로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을 겁니다. "조조가 역적이라는 비판이 조정 한복판에서 나왔다" "그 신하들도 모두 속이 시커먼 자들이라더라" 이런 말들이 저잣거리에서 끓어올랐을 테고요. 원소 집단은 쾌재를 불렀겠지요. 


예형은 정확하게 조조 정권의 심장부를 타격한 것입니다. 


"너는 역적이다"라고 말하는 상대조차 마음대로 죽일 수 없으니 조조 입장에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입니다. 예형이 하는 말이 기분 나빠서가 아니라, 실제로 정권의 근본을 무너뜨릴 수 있는 주장이었기에 조조는 어떻게든 예형을 처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조조는 예형을 또 다른 유학자 출신 정치가인 형주의 유표에게로 보냅니다. 유학자가 스스로 유학자를 처단하게끔 해서 비난의 화살을 피하려는 계책인 거죠.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유표는 예형과 깊은 토론 끝에 그에게 감복하긴 하지만, 역시 그 독설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역시 자기의 수하 장수인 황조에게 그를 넘깁니다. 황조도 예형을 처음에는 좋아하다가 예형이 자기를 개에 비유하며 독설을 퍼붓자 목을 날려버립니다. 


이문열 작가가 본인의 <삼국지>에서 예형의 죽음을 묘사하는 대목은 어쩐지 서늘합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물어뜯는 예형의 폭주를 죽음을 각오한 지식인이 더 내놓을 것이 없어 나락으로 질주하는 모습처럼 서술하기 때문입니다. 조조는 나중에 예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썩은 선비의 세치 혀가 스스로의 목숨마저 잃게 했다. 마땅히 경계할 일일 진저!"라고 비웃는데, 절대권력 앞에 선 지식인의 초라한 한계를 조롱하는 것 같아 아찔해집니다. 




4. 이게 제대로 된 비유일까요?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유비의 길은 사실상 예형이 제시한 프레임을 따라갑니다. 조조=역적, 그런 조조를 치는 유비=충신. 이제 우리는 진중권을 예형에 비유하는 논평을 보면서 의아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웬만한 삼국지 독자들은 예형을 죽이려 드는 사람을 '역적'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굉장한 위험을 감수하는 비유인 것입니다.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이걸 알고서 이런 비유를 쓴 걸까요? 자칫하면 문재인 대통령을 '독재자'로, 진중권 교수를 독재에 항거하는 '저항 지식인'으로 보이게 할 수 있는 자충수가 될 수 있습니다. 


예형은 삼국지를 어지간히 읽은 사람이 아니라면 잘 기억도 안 나는 캐릭터입니다. 정교한 비유를 시도했다기보다 그 인물에 얽힌 에피소드를 활용한 전반적인 인상비평을 의도했을 것인데... 이렇게 정반대의 해석이 나오는 비유를 할 거면 그냥 다른 비유를 드는 게 나았을 겁니다.  


조조는 나중에 예형 편을 들었던 공융을 애매한 죄목을 뒤집어 씌워 참수합니다. 자신을 평생 도왔던 유학자 출신 책사 순욱이 자기에게 저항하자, 그 역시 몰아붙여 자살하게 만듭니다. 말년의 조조를 막을 수 있는 유학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세운 위나라는 불과 50년을 넘기지 못하고 또 다른 반역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진중권 씨의 발언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정권을 비판하는 학자를 대놓고 '예형'에 비유하는 정당 대변인이 무섭게 느껴졌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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