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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플러스 인생 Jun 05. 2022

세 번째 이야기, 노숙 자경 (5)

천하삼분, 노숙이 그렸다

<운명의 교차점, 장판파로 향하다>


유비가 조조에게 패해서 달아나고, 또 유표의 아들 유종이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에게 항복하는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던 시점, 노숙은 주군 손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 유비와 동맹을 맺어서 형주 지역을 장악해야 된다. 만약에 유비가 유표의 뒤를 이을 만한 인물이면 유비와 동맹을 하면 되고, 유비가 그런 능력이 없어서 이 세력이 그대로 흩어질 것 같으면 우리가 공격해서 삼켜버려야 된다" 


보시다시피 노숙이 유비와 동맹을 추진한 건 유비를 그냥 무조건 좋게 봐서가 아닙니다. 유비가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니면 삼킬 생각도 하고 있었어요. 노숙은 결코 현실을 도외시하는 사람도 아니고 전쟁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동맹을 맺을 대상인 유비도 결격 사유가 생기면 가차 없이 베어버릴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손권 진영 내부에서 유비와 동맹에 다들 회의적이니까, 외교 사신으로 갈 사람이 없으니 자기가 직접 갑니다. 어디로 가느냐? 당양 장판벌. 조조의 대군에 쫓겨서 유비군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그 장판파까지 직접 간 거예요. 사안이 급박하니까, 급하게 움직인 겁니다.


이 장면은 만화 <창천항로>에서 굉장히 극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죠. 처음 노숙은 유비하고 간단한 회담 정도를 하러 간 거였는데, 조조군이 몰려와서 유비군이 도망치고 있는데 수십만의 민중이 자발적으로 그 뒤를 따로 있는 모습을 보고서는 "손가가 나아갈 길은 바로 여기 지금, 나 노숙 개인의 재량으로 결단을 지을 수밖에 없다!"라고 외치죠. 


유비 진영을 찾은 노숙은 제갈량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형, 제갈근의 친구요!"


제갈량에게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외교적 파트너라는 걸 확실하게 알리고, 동맹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죠. 수십만의 백성들이 따르는 유비라면, 우리의 전쟁에 적벽대전의 명분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이었을 겁니다. 유손 동맹을 아주 적극적으로 추진한 건 노숙이었습니다. 제갈량은 단지 노숙의 외교적 파트너였을 따름이지요. 




<"항복은 말도 안 됩니다">


제갈량과 동오로 돌아온 노숙. 삼국지연의에서는 여기부터 유명한 장면들이 펼쳐지는데요. 제갈량이 오나라의 명사들 여러 명을 혼자 상대해 격퇴시키고, 손권에게는 '우리 유비님은 절대 항복 안 합니다. 근데 당신은 겨우 손권이 아닙니까? 손권님은 손권님밖에 안 되니까 항복하시던가요' 이렇게 손권을 도발해서 동맹을 이끌어내는 재밌는 장면이 있죠. 


그런데 정작 정사 삼국지를 보면 이 대목이 <제갈량전>에는 상당히 빈약하게 묘사가 되어 있고 오히려 <노숙전>에 굉장히 자세하게 묘사가 돼 있습니다. 노숙전에 따르면 손권을 역으로 도발해서 화나게 만들고 동맹을 이끌어낸 건 노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항복을 고민하고 있던 손권에게 노숙이 해주는 결정적 조언이 있습니다. 


'나는 항복하면 조조가 벼슬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냥 조조의 아랫사람인 거니까. 그래서 당신 밑에 있는 부하들이 당신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조조에게 항복하면 그냥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당신은 항복할 수 없다. 항복해선 안된다' 


이런 정확한 조언을 제공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손권이 조조에 대항해서 싸울 생각을 하게 만든 것도 제갈량이나 주유가 아니라 노숙이었다는 이야기지요. 이런 대목들이 역사에 남아 있는 데도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모든 공로가 주유와 제갈량, 특히 제갈량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나관중 선생님, 좀 너무하시다! 


하지만 삼국지연의가 훨씬 드라마틱하고 재밌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요. 


이렇게 노숙은 적벽대전이라는 구도를 실질적으로 만들어내고, 유-손 동맹, 촉-오 동맹 외교적 성과를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내서 전쟁으로 끌고 갔던 적벽대전의 실질적인 설계자였습니다. 




<"손권이 유비에게 땅을..." 붓을 떨어뜨린 조조>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뒤, 유비와 손권이 형주 지역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니까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라는 조언도 노숙이 합니다. 어라? 오나라가 늘 갖고 싶었던 땅, 형주인데... 유비는 저리 치워버리고 형주를 지배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노숙은 과감하게 유비 세력에게 영토를 갈라주자고 합니다.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를 내어주게 된 가장 큰 배경은 노숙의 적극적인 조언이었습니다. 


이미 충분한 세력을 갖고 있는 오나라가 왜 유비를 키워줘야 될까요? 그래야 조조에 대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유비와 함께 조조를 상대로 세력 균형을 이룰 때, 천하삼분이라는 그림을 노숙이 명확하게 머리에 갖고 있었다는 거죠. 


오나라 내부에서는 분명 볼멘소리가 나왔을 겁니다. 미친 거 아닌가? 남에게 땅을 갈라주고... 이적행위야 이적행위. "노씨 집안의 미친놈" 소리가 여기서도 나왔을까요? 유비 진영에서 보면 호구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아마 제갈량 정도 되는 책사가 아니었다면 이 결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열심히 싸웠으니까 당연히 땅을 받는 거지!" 하고 오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같은 시각, 유비가 손권에게 땅을 제공받았다는 말을 들은 조조는 '붓을 땅에 떨어뜨리고' 맙니다. 역사서에 기록돼 있는 사실입니다. 


이제 유비가 날개를 달았구나! 대체 누가 그런 파격적인 일을 해냈단 말인가? 


유비, 손권 진영에서는 의아해하던 이 결정이 바로 주적, 조조의 입장에서는 붓을 땅에 떨어뜨릴 정도로 무서운 결정이었던 겁니다. 천리 밖에서 간웅, 조조의 간담을 외교로서 서늘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노숙이었다는 거죠. 


노숙의 선택이 너무 용기가 없고, 수세적으로 물러서는 선택이 아닌가 평가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런 대목들을 보면 오히려 적극적, 공세적 외교이자 평화 해법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평화를 구축하는 게 반드시 수동적, 수세적인 결정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평화가 이룩될수록 조조는 벌벌 떨게 된다는 것이죠. 현대 사회에서도 돌이켜 생각해볼 만한 대목입니다. 


이렇게 노숙, 제갈량이라는 뛰어난 외교관들의 대국적인 시야와, 이 결정을 과감하게 용인해준 유비, 손권이라는 당대 가장 그릇이 큰 두 군주의 결단으로 인해 위나라의 천하통일은 수십 년을 후퇴합니다. 


그러나 이 외교적 성과는 안팎으로 공격받기 십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충분히 예견 가능하지요. 노숙은 어렵게 만든 이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또다시 가시밭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노숙 인생의 하이라이트, '익양대치'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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