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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샬럿 Aug 24. 2016

잠시만 안녕, 하루키

마지막으로 남은 하루키 책을 읽으며, 뭉쳐둔 기억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는 여전히 인기 작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외국 소설가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 정작 이렇게 말하는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편이 못 된다. 하지만 내 호불호가 무슨 상관이랴. 때때로 이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지인 한국에서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호칭만 봐도 그렇다. '무라카미'도 아니고 무려 '하루키'라니! 파울로 코엘료도 '코엘료'고 천하의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베르베르'인 마당에 말이다. 어쩌면 기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일 수도 있다. 보통의 외국 작가들은 성으로 불린다. 우리처럼 이름이 석 자뿐이라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어디 그런가. 프란츠 카프카, 어니스트 헤밍웨이,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표트르 일리치 도스토옙스키... 길디 긴 이름을 다 부르기엔 해얄 말이 많으니 뒤의 성이라도 불러대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유명세를 타다 보니 이름을 줄여 부를 필요성이 커졌다. 그런데 아뿔싸, 그는 일본인이었던 것이다. '하루키' '하루키' 라고 부르던 사람들조차 어리둥절했을 터다. "근데 이 사람 성 무라카미 아니었어?" 그러나 이미 굳어진 걸 어쩌랴, 그냥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친근하기 그지없게도 이름으로 불리게 된 사나이, 어쩌면 그가 '하루키'일지도 모른다.



젊디젊은 하루키. 에세이집에 수록된 사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사물과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한 즈음의 기억부터라면, 그는 20세기 극후반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초등학교 5-6학년 될 무렵이었다. 요사이는 <노르웨이의 숲>이란 원제로 통용되고 있는 <상실의 시대>가 그의 명성을 견인했다. 긴 시간을 겨우 견디고 남은 잔상이 흐릿해 정확하진 않지만, 어느 통신사 광고에 그 책이 잠깐 나왔다. 이전부터 유명세야 있었던 모양이지만 이후부턴 아예 양상이 달라졌다.


매스컴은 활자와 소리로 연일 무라카미 하루키와 <상실의 시대>를 연호했다. 어른들의 세계와는 별 상관이 없는 어린 내 눈에도 책에 대한 열기는 대단해 보였다. 급기야 책은 그 해의 문화코드 비슷한 것이 됐다. 아마도 광고 특유의 영상 이미지가 더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광고 속 주인공은 기차 여행 도중 이 책을 읽는다. 보얀 잿빛이 희미하게 덧씌인 기차 여행 영상은, 밀레니엄을 앞둔 사람들의 몽환적 낭만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광고주든 디렉터든 <상실의 시대>를 상당히 잘 이해한 편이었다.


열 세 살의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책이길래 이다지 난리인 걸까? 하굣길에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시장 쪽에 접해 있었던 동네서점에 들러 <상실의 시대>를 샀다. 5,500원이었다. 그 즈음 내 일주일 용돈이 3-4천원이었다. 나름 큰맘 먹고 산 것이었다. 더불어 내 스스로 최초로 산 '어른 소설'이기도 했다. 물론 그때는 그 정도로 '어른스러운' 소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1장부터 들이닥친 참으로 화려한 섹스 묘사에 그만 깜짝 놀라 책을 후다닥 덮었던 기억이 난다. 맙소사, 2주 꼬박 군것질도 안 하고 모은 돈으로 산 책이 무려 도색도서(그땐 정말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라니. 정말로 울고 싶었다. 그 후 며칠에 걸쳐 참고 읽어보려 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책의 66쪽에는 한동안 손수 만든 종이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책은 열다섯에 처음 간신히 읽어냈다. 솔직히 다 이해하지 못했다. 잿빛 분위기의 소설 그 이상의 감흥을 느끼기엔 좀 어렸던 것 같다. 다시 읽은 건 스물 두 살 때였다. 확실히 달랐다. 뭐랄까, 딱 눈물이 나지 않을 만큼 슬펐다.


지난날 나오코의 아름다움의 그늘에 보였다 사라졌다 하던 어떤 날카로움―상대방을 문득 서늘하게 만들곤 하던 그 얇은 칼날과 같은 날카로움―은 멀리 뒤로 물러서 있었고, 그 대신 부드럽게 감싸주는 듯한 독특한 차분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 아름다움은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불과 6개월 동안 한 여성이 이렇게도 많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오코의 새로운 아름다움은 이전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나를 매혹시켰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사라져 버린 그 무언가를 생각하니 아쉽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사춘기 소녀의 독특한, 그 자체가 성큼성큼 혼자서 걸어가는 듯한 고집스러운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그런 모습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조금 거칠게 비유하자면, 나는 눈물이란 어떤 '절차'를 거친다고 생각한다. 가슴 언저리에 있는 커다란 연못을 먹먹한 마음의 구름이 잔뜩 둘러싼다. 구름이 쌓이고 쌓이면 비가 내린다. 연못은 금세 넘친다. 넘친 물은 가슴을 식도를 타고 올라가 눈물샘에 고인다.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슬픔이나 감동의 모티프는 가슴 속에 구름을 만들어낸다. 어떤 구름은 어마어마한 떼로 몰려와 눈물샘을 넘어 눈이며 턱 끝까지 철철 흘러 넘치게 한다. 어떤 건 그냥 몰려왔다 가기도 한다. 비가 되고 연못을 넘치게 해도 눈물샘까진 도달하지 않는 정도의 구름도 있다. 당시 <상실의 시대>는 맨 후자였다. 나는 그게 좋았다. 청승맞게 울지 않아도 적당히 먹먹한 여운이 오래 남는 소설, 그 정도면 됐다. 특유의 비유가 많고 빙빙 돌리는 문장도 그땐 신선했다. 무엇보다 숙제를 해결한 기분이었다. 열셋에 산 책을 스물둘이 되어서야 온전히 내 지각의 세계로 입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엔 문득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그의 작품을 읽었다. 바로 다음 읽은 것이 아마 <해변의 카프카>일 것이다. 부모님이 카프카의 팬이었을 것이 확실한 소년 다무라 카프카와, 태평양 전쟁의 부작용으로 사람의 말은 하지 못하고 고양이 언어만 말할 수 있는 나카타 노인, 남자이면서도 여자였던가- 소수자적 성별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오시마, 도서관 관장이었던 사에키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악역 하나. 내용이 잘 기억나진 않지만 무슨 돌을 들어올려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오가던 것이었다. 당시엔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문장 곳곳에서 빛나는 문제 의식도 좋았다.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은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 자국이 남아. 그렇기 때문에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비관용성 독불장군 같은 계급투쟁의 운동 방침, 공허한 말들, 찬탈된 이상, 경직된 시스템. 내가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런 것들이야. 나는 그런 것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증오해." (pp.322-324)


직후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은 것 같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산다는 쿠로야미와 오동통하고 귀여운 캐릭터로 묘사됐던 박사의 손녀딸이 기억난다. 그 책 역시 두 개의 세계가 등장한다. 하나는 '조직'이라는 이름의 단체에 몸 담은 계산사인 나의 세계, 다른 하나는 견고한 성 안팎에서 '꿈 읽는 자'로 살아가는 나의 세계. 당연히 전자가 현실이고 후자가 꿈의 세계일 것이라 생각하며 소설을 읽어나가지만, 종래에는 어느 것이 꿈이고 현실인지 그만 헷갈리게 된다. 연이어 읽은 두 소설은 큰 틀에서 비슷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작가는 '보이지 않는 세계'라든지 '무의식의 가능성'에 관심이 많구나,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공정함이란 지극히 한정된 세계에서밖에 통용되지 않는 개념 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 개념은 모든 영역에까지 미친다. 달팽이부터, 철물점의 카운터, 결혼 생활에까지 그것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아무도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해도 내게는 그것 외에는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정함은 애정과 비슷하다. 주려고 하는 것이 요구하고 있는 것과 합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러 가지 것들이 내 앞을, 또는 내 안을 통과해 지나가버리고 만 것이다. (pp.353-354)


그 다음이 아마 <1Q84>였을 것이다. 신작으로 출간된 해의 늦가을이었는데, 십 몇 주 째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주인공들 이름이 덴고와 아오마메였던가. 여기도 두 개의 세계였다. 좀 더 치밀해진 플롯과 견고해진 장치들이 눈에 띄었다. <카프카>에서 태평양 전쟁을 끌어온 것처럼, <1Q84>는 전공투 무렵 전후 있었을 법한 비밀조직의 역사를 실제의 것처럼 녹여냈다.


더군다나 하루키는 개인적으로도 옴진리교와 같은 사이비 종교단체의 맹목적 교리와 비정상적이고 폐쇄적인 공동체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선지 소설 곳곳에서 옴진리 혹은 훗날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모 종교집단이 데칼코마니처럼 겹친다. 실재를 기반으로 한 허구가 리얼리티에 근접해 가는 모습은 독자를 숨죽이게 한다. 비록 두 세계의 존재, 무심결에 지나친 장소나 사물이 소위 '텔레포트'로 기능한 결과 주인공들이 세계의 뒤바뀜을 경험한다는 것, 영매(매개체)와의 성교가 환상과 각성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는 부분 등 전작에서 줄곧 답습해 왔던 '하루키적 장치'는 이 소설에서마저 어김없이 등장하기는 한다. 그럼에도 훨씬 촘촘해진 구성과 작가의 지식이 여지없이 발휘된 사회적 배경 덕에 작품들 중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즈음부터 슬슬 그의 소설들이 식상해지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선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어." 남자는 말했다. "선악이란 정지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장소와 입장을 바꿔가는 것이지. 하나의 선이 다음 순간에 악으로 전환할지도 모르는 거야.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묘사한 것도 그러한 세계의 양상이야. 중요한 것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선과 악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면 현실적인 모럴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돼. 그래, 균형 그 자체가 선인 게야."




소설뿐 아니었다. 에세이까지 읽었다. 누가 들으면 수필까지 챙겨 읽는 엄청난 팬인 줄 알겠지만, 접한 건 우연한 계기였다. 스물다섯 가을쯤에 10km 짜리 마라톤 대회를 처음 준비할 때였다. 중학교 때였나, 당시 독일 녹색당 당수가 쓴 <나는 달린다>라는 자전적 에세이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났다. 다시 그 책을 읽어보고 싶어 도서관을 찾았다. 검색용 컴퓨터 앞에 고개를 주욱 빼고 서서 키워드 란에 '달리기'를 치고 검색 버튼을 눌렀다. 제일 윗 칸에 나온 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익숙한 작가이기도 하고 내용도 궁금해 빌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재미있었다. 달리기란 그때의 내게만 해도 막연한 것이었다. 한계에 도전하고 싶긴 한데,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내가 참아낼 수 있을까. 에세이는 그런 내게 요란스럽지 않게 용기를 줬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비틀즈의 노래가 나오는 라디오를 들으며 일정한 분량의 글을 쓰는 것처럼 달리면 된단다. <달리기>는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허세조차도 누군가에게 묘한 위안이 되는 삶이라니, 작품과는 별개로 부러운 인생이다.


하루키의 취미 중 하나가 마라톤이다. 그는 풀 코스를 거뜬히 완주해 낸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그쪽 에세이도 많이 썼다. 이후 읽은 게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와 <재즈의 초상>이었다. <재즈의 초상>은 솔직히 속아 산 느낌이 아직까지 있다. 인터넷으로 급히 산 통에 그렇게 얇은 삽화집인 줄 몰랐던 거다. <스윙>은 흥미로웠다. 나 역시 클래식과 올드팝을 좋아하고, 그때 한창 재즈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터라 공감가는 내용도 많았다. <카프카>부터 부쩍 눈에 띈 음악 이야기들이 그 책에 거의 다 있었다.




<언더그라운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저작을 통틀어 가장 좋아한다. 사실 에세이 몇 편까지 읽은 즈음이 되니 슬슬 하루키라는 작가에게 묘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소설은 장치와 세계관이 지나치게 반복되는 것 같고, 에세이는 20세기에나 어울릴 흘러간 낭만이 글을 눌러버릴 정도로 너무 짙은 공기를 풍기며 도처에 깔려 있었다. 그때 읽은 것이 이 책이었다. 1995년 옴진리교 지하철 테러 사건의 피해자들을 하나하나 인터뷰하고 경찰 공식 기록과 신문기사 등을 모아 만든 취재 에세이다.


이 책은 정말 좋았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왜 그가 그토록 '또 다른 세계'와 '무의식'에 집착했는지, 전 소설을 관통하며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쓸 선택권을 줘서는 안 된다"고 외쳤는지. 그는 여태껏 단순히 현실과 환상이라는 이분법으로서의 세계를 그리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흘러가는 현실의 밑바닥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과 존재들이 꿈틀대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은 언제든 현실 곳곳에 난 틈새로 조금씩 스며들어 우리 세계의 벽을 침식시킬 수 있다는 경고였다. 아무런 죄도 없이, 단지 잘못된 신념과 신앙의 제물로 '어긋난 선택을 당한' 피해자들은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생과 작별을 고했다. 살아남았다 한들 심각한 후유증을 안고 비참한 나날을 보내는 터였다. 활자들은 절규하고 있었다. 부디 보아달라고. '자신'을 잃어버린 세계와 이야기가 얼마나 잔혹한지, 타인의 '상상력'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 와다 요시코 : 텔레비전에는 이제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절대로 나가지 않을 겁니다. 진실을 전하지 않아요. 진실을 전해주길 바랐는데, 방송국은 자신들 형편에 좋은 것만 방송했습니다. 제가 정말 말하고 싶은 부분은 전하지 않았습니다. (…) 희생자가 거기에서 얼마나 괴로워하며 죽었는지, 매스컴은 조금도 보도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실은 조금도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마츠모토 사린 사건 때는 조금 보도되었지만 지하철 사린 사건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픽 쓰러져 그대로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요. 신문 기사도 이거나 저거나 모두 마찬가지예요. 나도 검찰청에 가서 검사가 읽는 조서를 통해 비로소 남편이 굉장히 괴로워하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죽었는지. 얼마나 허망한 가슴으로 죽어갔는지를… 결국 남의 일이 되어버리는 모양입니다. 나도 당사자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건 다른 사람 일이라고.


당신은 (혹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유의 자아를 가지지 못할 때 당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 엔진 없이 차를 만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리적 실체가 없는 곳에 그림자도 없는 것처럼. 그런데 당신은 지금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자아를 양도해버렸다. 그때 당신은 과연 어떻게 하면 좋은가? (…) 당신의 자아가 일단 타자의 자아에 동화되어버리면 당신의 이야기도 타자의 자아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문맥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우리는 어떤 제도, 곧 시스템에 대해 인격의 일부를 건네주고 있지는 않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제도는 언젠가 당신을 향하여 어떤 ‘광기’를 요구하지 않을까? 당신의 ‘자율적 파워 프로세스’는 올바른 내적 합의를 얻고 있는가?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정말 당신 자신의 꿈인가? 그것은 언제 어떤 악몽으로 변해 버릴지 모를 누군가의 꿈은 아닌가?


이 지하철 사린 사건에 관해 정부는 빠른 시기에 각 분야의 전문가를 모아 공정한 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숨겨진 사실을 규명하고 주변 시스템에 대한 철저한 재검토를 했어야 했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조직의 정상적인 대응을 저해했는가? 그런 사실적 추구를 엄하고 면밀하게 행하는 것이야말로 사린가스에 의해 불행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 우리들이 표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며 또한 절박한 책임이 아닐까. 그리고 거기에서 얻은 정보는 부문별로 밀폐할 것이 아니라 널리 세상에 공개하고 공유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대응이 없는 한 체질화된 실패가 다시 반복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이 거대한 사건을 통과하여 도대체 어디로 향해 나아가려 하는가? 그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이 지하철 사린 사건이라는 ‘지표 없는 악몽’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3년 전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하루키를 찾아 읽지 않았다. 그때 읽은 것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였다. 내겐 아주 싱거운 <상실의 시대>였다. 극단의 무염식 같은 느낌이랄까. 재료라도 색다르면 좋았을 텐데 전에 먹어본 것이었던지라. 아, 최신작인 <여자 없는 남자들>도 사긴 했다. 두 쪽 읽고 '이건 확실히 재탕이구나' 싶어 덮었지만. 심지어 그 책은 알라딘에 팔아버렸다. 신작이긴 해도 중고서적이라 기증에 가까웠다. 뭔가 이런 말을 하루키 이름을 내걸고 제목으로 단 글에 쓰자니 하루키에게 상당히 미안하지만... 그랬다.




소설 중 마지막까지 책장에 남아 있던 네 권 짜리 <태엽 감는 새>를 요 며칠새 읽었다. 역시 두 개의 세계다. 이쪽 주인공은 오카다 도루고, 고양이가 사라진 뒤 돌연 자취를 감춘 아내 쿠미코를 찾기 위해 현실과 의식의 세계를 넘나든다. 와타야 노보루, 카사하라 메이, 카노 몰타, 카노 크레타, 아카사와 너트메그와 시나몬 모자, 혼다 노인, 마미야 중위... 가장 최근에 읽어선지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대한 기억이 제일 성하다.


전체적으로 <원더랜드>와 <1Q84>의 가교가 되는 소설이다. 특히 소설 곳곳의 장치는 <1Q84>와 상당 부분 교집합을 형성한다. 여기서 구축한 세계관을 훗날 소설에서 바닥을 다지고 벽을 쌓아올린 것이다. 동시에 만주전쟁과 노몬한 전투를 겪으며 회의형 인간이 되는 혼다 노인과 마미야 중위의 모습에선 <카프카>의 나카타 노인이 아른거린다. 여러모로 하루키식 세계관과 플롯을 정립한 작품이다. 동시에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준 후속작들에 이르는 디딤돌 소설임도 분명하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치르고 있는 전쟁은 암만 생각해도 제대로 된 전쟁이 아닙니다, 소위님. 이것은 전선이 있고, 적과 정면으로 결전을 시도하는 것처럼 분명한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진합니다. 적은 거의 싸우지 않고 도망칩니다. 그리고 패주하는 중국 병사는 군복을 벗고 민중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적인지 우리는 그것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적 사냥, 패잔병 사냥이라는 이름 아래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식량을 약탈합니다. 전선은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데 보급이 따라오지 못하니까, 우리는 약탈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포로를 수용할 장소도, 그들을 위한 식량도 없기 때문에 죽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잘못된 일입니다. 난징 부근에서는 너무 지독한 짓을 했습니다. 우리 부대도 그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몇 십 명이고 우물에 집어넣고, 위에서 수류탄을 몇 발 던져 넣었습니다. 그 밖에 입으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짓도 했습니다. 소위님, 이 전쟁에는 대의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건 단지 서로 죽이는 살육입니다. 그리고 짓밟히는 것은 결국 가난한 농민들입니다." (p.286)






누군가 내게 하루키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글쎄. 마땅히 뭐라 말해얄까. 아마 곤란할 때 으레 짓는 미소로 답을 대신하지 않을까. 그의 몇몇 작품은 확실히 좋아하지만, 작가 하루키를 좋아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쓰고 보니 내가 적잖이 그의 작품을 읽어왔구나 싶다. 이렇게까지 길게 쓸 생각은 없었는데. 책을 읽었던 때의 이런저런 기억이 덧붙어 버렸다. 사실 내 DIY 책장 한 칸은 모두 그의 책으로 차 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만큼 열정적으로 읽은 것 같지 않은데도, 워낙 다작한 터라 대표작 몇 개 사다보니 그렇게 됐다. 게다가 아직 한 권은 손때를 타지 않은 채 얌전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라는 인터뷰형 음악 에세이인데, 녀석은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읽어볼 참이다. 특유의 독특한 지휘를 만들어내는 그의 '음악'이란 과연 무엇일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상대를 만난 하루키 앞에서 풀어놓았을 거장 오자와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그러나 하루키는 당분간 쉬려 한다. 그가 싫어서가 아니다. 다만 이젠 그를 알 만큼은 안 것 같다. 매일 FM방송을 배경 삼아 커피를 마시며 오전 8시부터 11시까지는 무조건 글을 쓴다는 그이니 머지않아 신작도 발표되겠지만, 굳이 사서 보게 되진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아주 멀지 않은 때 다시 그의 활자와 마주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거장의 통찰이 기대되는 남은 단 한 권의 음악 에세이든, 두 개의 세계와 칠흑같은 어둠과 평범한 듯하지만 악에 대항해 무엇이든 구해내고야 마는 주인공이 등장할 신작 소설이든. 내 취향은 아닐지라도, 그가 언제나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글을 썼으면 좋겠다. 변함없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가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존재니까 말이다. 차기작은 이왕이면 하루키 특유의 날카로운 사회의식과 성찰성이 빛나는 글이라면 더 좋겠다. 하지만 내겐


잠시만, 당분간은, 어쩌면 조금은 오래, 안녕,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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