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식'과 '상상'이 빚어낸 아름다운 이야기
어느덧 작년이 되어버린 연말에 동생과 봤다. 내리 두 번을, 본인 얘기론 저번에 이어서 또 울면서 봤다는 동생 앞에서 뭐라 말해얄지 몰랐다. 예쁘고 여운이 남는 영화긴 한데 그 정도인가. 그렇다고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채우며 열변을 토하는 애호가 앞에서 애먼 말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핀셋으로 골라내듯 묘사하고 뜯어내는 동생의 말을 들으며, 나는 눈을 내리깐 채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겨울 공기가 내려앉은 보도블럭이 유난히 부얘보였다. 올해는 그래도 얘들이 배를 다 드러내는 일은 없구나. 참 매정하게도, 나는 감격이 스며들어 한 톤 높아진 동생의 목소리를 귓전으로 밀어낸 채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몇 번이나 영화에 대해 몇 자 남겨보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기록되지 않는 것은 금세 잊혀지기 마련이라 나는 한동안 초조했다. 그러다 그마저도 무의미해질 만큼 시간이 흘렀다.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조차 언어의 너머에 잠길 무렵이었다. 가맣게 멀어지는 기억을 다시 부른 건 라디오였다. 최근 듣기 시작한 점심 라디오에서, 라라랜드 OST가 흘러나왔다. 불시에 들이닥친 라이언 고슬링의 목소리는 망각의 해수층을 맹렬히 관통해 들어왔다. 이야기에 색을 입히고 빛을 비추던 그 영화의 음악들은, 기억의 파장이 되어 해저부를 뒤흔들었다. 잊고 있었던 영화의 무언가들이 범람했다. 하루의 틈마다 영화 생각이 들이닥쳤고, 급기야 OST 앨범을 내내 재생하기에 이르렀다.
이 영화가 왜 그토록 오래간 무언가 남기고 싶게 했던지, 조금 생각했다. 반짝이는 장면들, 결이 고운 노래들... 마냥 아름답게만 보인 영화라면 이렇게까지 흥행하진 못했을 터다. 모든 영화는 목소리를 갖고 있다. 관건은 시대를 향한 목소리의 진폭이다. 즉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각인되는가의 문제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무심결에 지나치고 잃어버린 것들을 발견할 때, 앞만 보고 오느라 어디서 흩놓고 와 버린 건지 알 수조차 없는 소중한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더구나 그 이야기가 낭만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기까지 할 때, 영화는 영원한 기억이 된다.
라라랜드의 주인공들은 '구식'의 소중함을 안다. 특히나 내게 영화 속 세바스찬이 유독 각인된 이유다. 재즈 피아니스트인 세바스찬은 주변의 냉소, 카페 연주 아르바이트로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생활에도 정통 재즈를 놓지 않는다. 뛰어난 실력에도 특유의 음악적 완고함 때문에 그는 이름을 알릴 호기를 번번이 놓친다. 정통 재즈는 그에겐 애호뿐 아니라 자존심이자 모든 것이다. 세바스찬의 열정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장면이 있다. 극중 여름이었던가, 미아와의 호감이 점차로 쌓여가던 단계에서 세바스찬은 그녀와 오래된 재즈바엘 들른다. 가게는 이미 거뭇하게 변하기 시작한 오랜 목재로 지어진 곳이다.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한 가운데, 통유리창으로 쏟아지는 자연광을 둘러맨 채 재즈 밴드가 무대(라기보단 단상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공간)에서 즉흥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아마도 뉴올리언스 계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길고 무수한 재즈의 흐름 중에서도 극초반에 속하는, '구식 중의 구식'을 연주하던 밴드를 시선의 사선에 두고 세바스찬은 미아에게 열변을 토한다.
"사람들은 재즈가 한 물 갔다고 말한다. 할아버지들이나 듣는 그런 음악, 아니 요즘은 할아버지들도 안 듣는 그런 구닥다리 음악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하지만 저 악기들이 빚어내는 음악을 보라. 트럼펫과 베이스와 피아노와 드럼이 제각각의 음조를 뽐내며 빚어내는 팽팽한 긴장,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리듬과 멜로디가 기막히게 화합해 가는 마법. 세상 어디에도 재즈와 같은 음악은 없다. 형식을 철저히 파괴하면서도 음악이 될 수 있는 음악은 재즈뿐이다. 파열들이 빚어내는 이 아름다운 선율을 보라. 내가 재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확한 대사랄 순 없지만, 비슷한 느낌으로 열렬히 '고백'하며 세바스찬은 미아에게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를 말한다. LA의 한복판, 재즈의 성지에 자신의 이름을 건 정통 재즈바를 세울 거라고. 재즈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구식을 향한 편견을 보란 듯이 날려줄 멋진 공간을 만들겠다고. 땡전 한 푼 없던 재즈 청년의 꿈 치곤 어딘지 거창하지만, 세바스찬은 진지하기만 하다. 재즈와 꿈을 향한 그의 열정은 투박하지만 우직하다. 이 장면에서 미아의 마음에 고요한 파문이 이는 듯하다. 그의 맹목적이리만치 거친 열정이 배우 지망생인 자신의 것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세바스찬과 미아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둘은 자연스레 연인이 된다.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꿈을 응원하며 몇 계절을 난다. 이 아름다운 시절은 마치 동화의 한 장면처럼 영롱한 색감의 시퀀스로 채워진다. 그리고 이윽고, 미아에게도 자신만의 구식을 지켜낼 순간이 찾아온다. 소녀 시절의 미아는 연출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우연히 재능을 알아본 세바스찬의 지지에 힘입어, 그녀는 한때 꿈꾸다 접어둔 모노극에 도전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 구식의 세계에 조금씩 균열이 간다. 파국은 아이러니하게도 세바스찬으로부터 시작된다. 재즈를 변용하는 이들에 독설을 내뱉었던 그는, 정작 컨템포러리 재즈팝으로 승승장구하는 동창 키이스의 협업 제의를 뿌리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뜻이 오늘날에 맞지 않는 것임을 못내 인정한다. 사랑하는 미아와 팍팍한 생계가 그의 시야를 어지럽힌다. 존 레전드가 분한 키이스 밴드의 키보드 주자가 된 그에겐 곧바로 넉넉한 돈이 주어진다. 음반 취입과 전국 투어로 이어지는 고단한 스케줄은 미아와의 관계는 물론 그 자신마저도 갉아먹는다. 그에겐 더 이상 예전의 꿈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어보인다. 미아는 공연장에서 타협 혹은 다소 체념한 듯한 얼굴로 전자 키보드 건반을 묵묵히 누르는 세바스찬을 안타깝게 지켜본다. 게다가 부와 명성을 축적해 가던 세바스찬과 달리, 미아의 '구식으로의 회귀'였던 모노극은 관객의 혹평을 받으며 대실패한다. 누군가는 구식을 저버리고 다른 이는 구식에 버림 받은 사이,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며 둘의 관계에 조금씩 틈이 생긴다.
모든 걸 포기하고 귀향한 미아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모노극에서 그녀의 연기를 인상 깊게 본 연출자가 캐스팅 제의를 해 온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간 자리에서, 미아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그리고 당당히 주연 역을 꿰찬다. 이후 그녀가 세계적인 스타로 거듭났음을 암시하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미아의 성공을 이야기하는 소품들의 향연에서, 세바스찬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관객이 조금씩 둘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플롯은 어느덧 적잖은 시간을 건너뛴다. 미아의 곁엔 다른 남자가 있다. 스크린은 내심 세바스찬을 찾는 관객들에게 일말의 기대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이 부부의 갓난아이를 비춘다. 미아가 남편과 걷는 모든 길은 이전에 세바스찬과 이미 함께 했던 길이다. 관객의 씁쓸한 기시감을 알 리 없는 미아의 남편은 행인들을 집어삼키는 어느 바에 흥미를 보인다. '셉스'라는 간판 ― 심지어 미아 자신이 권한 쉼표 디자인을 한 ― 을 본 미아의 눈이 커진다. 즉흥 재즈를 선보이던 밴드의 연주 뒤에, 그가 무대에 올라왔다.
세바스찬은 결국 해냈다. 그는 그의 구식을 기어이 지켜냈다. 세련된 인테리어로 중무장한 셉스에서, 그의 음악이자 세계인 재즈는 당당하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밴드 소개 뒤에 이어진 세바스찬 자신의 피아노 독주는 고독하지만 한없이 반짝인다. 미아의 눈이 잔잔히 진동할 즈음, 그친 선율과 함께 들이친 남편의 음성으로 그녀의 생각도 멎는다. 남편을 따라 셉스 밖을 나서는 미아의 뒷모습을 세바스찬이 바라보고, 미아가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둘은 미소 짓는다. 아마 그것이, 그들 평생의 마지막 만남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도 그렇게 구식의 옛날이야기가 된 셈이다.
주인공 외에도 라라랜드엔 많은 구식들이 영화의 플롯과 감각들을 이룬다. 미아의 손에 이끌려 세바스찬이 관람한 영화는 고전 <카사블랑카>이며, 두 사람이 춤추고 노래하던 수많은 장면들은 헐리웃의 고전 뮤지컬영화들에 대한 오마주다. 쏟아지는 볕을 등지고 버스에서 키스하는 장면은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졸업>을 연상시킨다. 두 사람은 1950년대에 이미 명맥이 끊겼을 법한 왈츠와 탭댄스를 추며, 둘이 거니는 꿈결 같은 공간들엔 <미드나잇 인 파리>의 공기가 물들어 있다. 여기에 서로가 꿈을 이룬,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해피엔딩'으로 부를 만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식의 플롯까지. 그러나 이 모든 구식들은 오늘의 세계가 구현할 수 없는 향수이자 낭만이 되어 영화에 빛을 더한다. 특히 하얀 별이 촘촘이 박힌 밤하늘을 날아올라 왈츠를 추는 세바스찬과 미아는, 영화를 보지 않아도 손끝에 만져질 듯한 영롱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지나간 것들을 이토록 사랑하고 지켜내는 이들이 있으며, 누군가는 외면해온 구식들을 이만치 아름답게 그려내는 영화가 있다는 사실. 조금씩 잃어지는 것들, 이루지 못한 이야기들을 품어가며 사는 사람들에게 라라랜드는 따뜻한 위안이 되어준다.
한편으로 라라랜드는 철저히 상상을 이야기한다. 감독은 라라랜드가 단지 꿈의 세계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영화 군데군데 새겨넣는다. 제목에서부터 감독의 냉정한 단언은 도드라진다. <LA LA LAND>란 글자엔 두 사람이 사랑을 이뤄가는 무대이자, 헐리웃 스타가 된 미아의 기반인 LA가 녹아 있다. 동시에 이 단어 자체에는 '몽상의 세계'라는 뜻이 있다. 스타와 스타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들이 모여 반짝이는 거대한 도시. 누군가에겐 실존하는 영광의 세계지만, 대부분에겐 별이 되기 위해 찾아왔지만 아득한 좌절에 가로막힌 이들의 눈물이 반짝이는 땅이 바로 라라랜드다. 비록 먼 길을 돌아왔지만 세바스찬은 기어코 자신의 이름을 건 가게를 세우고, 미아는 어려운 시절을 딛어올라 헐리웃 대표 배우가 된다. 0.1%에도 수렴이 될까말까한 어마어마한 가능성의 결말이, 영화에선 너무도 자연스럽게 제시된다. 두 사람의 성공가도마저도 현실 같지가 않다. 그림 혹은 세트장 같은 배경을 넘나들고 별이 빛나는 밤의 허공에서 춤을 추는 연인의 모습은, 플롯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흩뜨린 채 철저히 '상상'에 도취되라며 주문을 거는 듯하기까지 하다. 이 놀라운 장면들의 타이밍 덕에, 외려 영화 전체가 상상의 세계임을 현실감 있게 느끼게 된다.
상상은 플롯 안에서도 변주된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 미아가 세바스찬의 독주를 지켜보는 장면이 그것이다. 푸른 조명빛을 받아 잔잔히 날아오르는 그의 음악을 딛고, 미아가 그린 듯한 가정의 세계가 화면에 펼쳐진다. 영화는 곧장 세바스찬과 미아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쌓아갔을 나날들을 그려낸다. 둘은 세바스찬의 공연과 미아의 촬영을 따라 해외 곳곳을 누비며, 세바스찬은 미아에게 프로포즈를 하고, 그들은 LA 근방에 남부럽지 않은 집을 가지고 있다. 미아의 아이는 둘의 작은 아이가 되어 있으며, 이 가상의 부부는 사랑과 추억을 거리마다 세워둔 LA의 한복판을 거닌다. 직전 장면에서 미아가 현재의 남편과 했던 일들이 세바스찬과의 그것으로 대체됐을 뿐이다. 그러나 이 장면이 주는 효과는 크다. 관객은 '미아의 상상' 장치로써 이어지지 못한 사랑을 지켜본 제3자의 아쉬움과 더불어 당사자가 느낄 법한 회한을 동시에 맛본다. 영화가 유일하게 상상이길 포기한 지점이 바로 세바스찬과 미아의 결별일 터. 이 설정 덕에 영화의 꿈결 같은 낭만 가운데 여트막한 애수가 드리운다. 온통 상상이었던지라 현실은 더욱 도드라지는 구석이 있다. 단 한 점의 현실에, 누군가는 몇 번을 보아도 눈물을 쏟는 여운이 탄생했다.
어쩌면 라라랜드는 꿈의 이야기다. 결국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것들로 꿈을 이루어낸, 그러나 꿈과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라라랜드는 꿈이기에 의미가 있다. 세바스찬과 미아가 이뤄내고야 만 꿈이든, 장면 하나하나에 스민 총천연 빛의 꿈이든, 이야기가 만들어낸 환상의 꿈이든. 무엇보다 현실과 너무 멀어지지 않은 꿈이기에 더욱 가슴을 울린다. 결코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