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우리의 나날>>
마흔이 되면 그 동안 해보지 못한 걸 해봐야겠다. 소설 읽는게 잔망스럽게 느껴져서 중학교 때 삼국지를 읽은 뒤로 소설을 거북이 등에 털나듯 읽었는데 후반생엔 태세 전환이다.
90년대 ‘후일담 소설’ 같은 제목이지만, 일본 작가 시바타 쇼의 1964년작 소설이다. 시바타 쇼가 1935년생이니 서른이 되기 전에 탈고했다. 200페이지도 미처 안 되는 얇은 책이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이 많아 눈에 꾹꾹 눌러 담듯이 읽었다.
1950년대 ‘학생 운동’을 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편입되기 시작한 20대 중반 젊은이들의 ‘후일담’이다. 도쿄대에서 ‘공산당’ 활동을 하던 사노는 대학교 2학년 때 지하에 숨어 군사조직에 가세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지하 생활을 하던 사노는 “무장봉기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하면 도망치지 않고 싸울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1년 뒤 사노의 고민이 무색하게 공산당은 무장 투쟁 노선을 포기한다. 사노는 무장 투쟁 포기 소식에 좌절보다 묘한 ‘안도’를 느끼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혁명을 두려워하는 당원, 얼마나 우스운 존재인가” 사노의 독백이다.
몇년 뒤 안정적인 기업에 취직해 ‘샐러리맨’으로 권태롭지만 안락한 생활을 보내던 사노는 예순을 갓 넘긴 부사장을 만난다. 죽음과 질병을 이야기하며 난감해하는 부사장을 바라보며 사노는 생각한다.
<<나는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생각할까?... 나는 배신자다>>
더 이상 혁명을 할 수 없는 혁명가는 존재 가치가 없다. 치욕적 현존이다. 혁명과 삶의 배신자일 뿐이다. 스스로를 배신자로 생각하는 사노는 자의식의 과잉 속에서 자맥질하다 극단적 선택을 한다.
사노의 유서는 사노와 대학 시절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힌 후미오와 세쓰코에게 전달된다. 사노의 죽음으로 결혼을 약속했던 후미오와 세쓰코의 관계도 흔들린다. 후미오와 세쓰코는 이별을 하고, 세쓰코는 열차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다. 실족인지 자살기도인지는 알 수 없다. 세쓰코는 ‘죽음이 눈 앞에 다가왔을 때 무엇을 떠올릴까’라는 의문에 아무런 대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후미오에게 편지를 남긴다.
후미오는, 그래도 살아남은 세쓰코를 생각하며 자문자답을 한다.
<<머잖아 우리가 정말로 늙었을 때, 젊은 사람들이 물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젊은 시절은 어땠냐고. ...우리 중에도 시대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로 용감하게 진출하고자 한 사람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 답을 들은 젊은이 중 누구든 옛날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데, 지금 우리도 그런 용기를 갖자고 생각한다면 거기까지 늙어간 우리의 삶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말줄임표로 끝난다. 나의 주관적 느낌이지만, 지금까지 내가 읽은 몇 권 안되는 소설 중에서 최고의 클로징이다. 기형도 시인의 말대로 “어차피 우리들 청춘이란 말없음표 몇 개로 묶어둔 모포처럼 개어둔 몇 장 슬픔 아니던가”
<<비가 오는 날이면 세쓰코의 상처 자리가 아프진 않을지. 아프다면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