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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달빛 May 16. 2017

세월호 이후 우리는 어떤 ‘드라마’를 보고 있는가

드라마

드라마를 압도한 현실을 살다


2013년 9월부터 2014년 5월까지 방영된 tvN 시트콤 <감자별 2013QR3>(감자별)에서 지구는 궤도를 이탈한 미지의 소행성과 충돌할 위기에 처한다. 가까스로 충돌은 피했지만 ‘일상과 종말’은 ‘두 개의 달(지구 주위를 맴도는 소행성으로 인해 달이 두 개가 되었다)’처럼 공존하게 되고, 유일한 세계였던 지구는 우주의 재채기 같은 충돌에도 간단하게 날아갈 만큼 불안정한 공간이 되었다. TV 뉴스에서는 행성 캐스터가 ‘오늘의 행성’ 소식을 매일 보도하고, 사람들은 ‘언제 종말이 올지도 모르는데……’라는 말을 숨처럼 내쉬며 살게 되었다. <감자별>이 처한 상황은 곧 우리가 직면하게 될 세상의 징후였을까? 2014년 4월 이후 우리는 ‘일상과 종말’이 상존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tvN 시트콤 <감자별 2013QR3>

그로부터 2년 후인 지난 9월 12일, 경주에서 5.8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 여름 내내 발정 난 매미처럼 울리던 재난경보 문자는 하필 지진 앞에서는 잠잠했고, 국민안전처 홈페이지는 접속이 불가능했다. 냉소로 포장한 불안과 분노가 ‘뉴스피드’를 어지럽혔다. 지진 발생 후 35일이 지난 10월 18일까지 경주에는 여진이 480여 차례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비일상은 일상이 되었다. 밭일하던 경주 어느 작은 마을 주민은 요즘 어떠시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 큰 지진이 아니면 걱정도 안 돼.” 9월 11일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풍경이 이제는 일상이 된 것이다. 2014년 4월 15일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얼굴처럼. 시스템을 긍정하고, 성실하게 축적되는 일상의 힘을 믿는 나에게 세월호 이후의 세상, 지진 이후의 일상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런 불가능성은 마치 ‘두 개의 달’ 중 하나처럼 우리를 지배한다.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만 침몰했다고, 지진이 경주와 인근 지역에서만 발생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세월호 같은 세상은 오늘도 생중계되고 있으며, 지진은 우리 일상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어느 날부터 매일 딛는 땅을 신뢰하기 힘들고, 들이마시는 공기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살고 있다. 안전하리라 믿었던 도심 한복판에서 여성이 살해당하고, 지하철 플랫폼에서 부품 취급받으며 격무에 시달리던 노동자가 사망한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000일(2017년 1월 9일)이 다가오지만, 진실은 아직 심연에 있고, 국가 폭력에 의해 무고한 시민 백남기 농민이 사망해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다. 세월호라는 지진이 셀 수 없는 여진을, 또 다른 본진을 만들어도 세상은 견고하다.


다른 문화 콘텐츠도 그러하지만, 특히 대중의 감각과 밀접하게 호흡하는 드라마는 당대의 사회를 예민하게 반영한다. 특히 세월호를 비롯한 거대한 재난이나 사건이 뒤흔든 후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나에게 드라마는 유의미한 사회학 참고서다. 다양한 인간의 얼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구현한 드라마를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보면 어느새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만나게 된다. 드라마는 그 질문에 새롭지는 않지만 가장 익숙하고, 현실적인 답을 내놓는다. 이 글은 세월호 이후 ‘일상과 종말’이 상존하는 세상을 예민하게 포착한 드라마에 관한 보고서다.


'세월호' 이후 드라마가 그린 세상 (1) 붕괴된 시스템


2001년 미국뿐 아니라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9.11 테러 이후, 미국 드라마들은 국제적인 테러사건에 맞서는 테러방지단(C.T.U : Counter Terrorist Unit)의 활약을 다룬 <24>(FOX) 등을 비롯하여 온갖 불의로부터 정의를 지키는 강하고 올바른 미국을 강조하며 일상의 ‘영웅’을 등장시켰다.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일본 대지진(3.11) 이후 일본 사회는 <가정부 미타>(NTV) 등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드라마가 등장하거나,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NHK) 등을 통해 3.11 이후 확산된 ‘미니멀리즘’ 열풍을 반영했다.


그렇다면 한국 드라마는 어떨까? 물론 모든 드라마가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클리셰로 가득한 이른바 ‘막장 드라마’는 여전히 시청자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도대체 무슨 의도로 만들었는지 모를 드라마도 존재한다. 그러나 세월호 이후 제작된 드라마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재난 이후의 사회적 공기를 반영한다. 그런 의도를 담지 않았다 하더라도 공동의 사회적 기억을 가진 시청자는 세월호 이후의 사회를 드라마에 투영하며 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형성된 콘텍스트(상황)와 창작자와 시청자의 교집합을 통해 일정한 흐름을 포착할 수 있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붕괴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첫째, 붕괴한 시스템에 관한 분노와 불신이다. 특히 세월호 1주기 즈음 방영된 <앵그리맘>(MBC)이 대표적이다. 학교 폭력을 당하는 딸을 지키기 위해 고등학교에 위장 잠입하는 엄마 이야기를 다룬 이 드라마는 학교 폭력뿐 아니라 사학 비리, 교육계와 정치권의 부패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현실에 차근차근 접근한다. 특히 각종 불의와 연계되어 부실하게 지어진 강당이 붕괴되는 사고를 다룬 에피소드는 세월호 이후 참혹하게 드러난 ‘붕괴한 시스템’을 은유한다. <앵그리맘>뿐 아니라 검찰과 법조계 비리를 다룬 <펀치>(SBS), <오만과 편견>(MBC), 무고한 시민이 살인자가 되는 과정과 아들의 복수를 그린 <리멤버>(SBS), 권력과 유착된 언론의 문제를 다룬 <피노키오>(SBS) 등의 드라마가 겨냥하는 것은 결국 시스템, 그 시스템을 지배하는 불의한 권력을 향한 분노와 불신이다. 


이런 정서는 <동네변호사 조들호>(KBS2)를 통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드라마는 특히 현실과 ‘싱크로율’이 높은 사건들을 전면에 배치해 화제가 되었다.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꼬집고, 잘못 제조된 에너지 드링크를 판매하여 사망자가 발생했는데도 연구 결과를 조작하여 이를 은폐하려는 회사와 진실을 밝히려는 피해자 가족 이야기는 ‘안방의 세월호’라 불리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상기시킨다. 특히 어린이집 아동 학대 문제를 다룬 ‘쓰레기 죽 사건’은 불의에 침묵했을 때 어떤 비극을 맞이하는지 보여준다.


붕괴한 시스템을 향한 불신과 분노는 그것에 대한 거부로 이어진다. 심지어 ‘국뽕’ 드라마라 비난받았던 <태양의 후예>(KBS2) 조차 타국에서 발생한 재난을 통해 국가(시스템)의 존재 이유를 물으며 개인을 희생시키려는 국가를 거부한다. 우르크 지역에 파병된 모우루 중대 알파팀장인 대위 유시진은 연인이자 의사 강모연이 지역 반군에 의해 납치되자 본진에 인질 구출 작전을 요청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적 차원의 문제”라며 대기 명령을 내린다. 유시진은 결국 “개인의 죽음에 무감각한 국가라면 문제가 생기면 좀 어때. 당신 조국이 뭔진 모르겠지만 나는 내 조국을 지키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단독 작전을 진행하여 강모연을 구한다. 


우리는 조들호나 유시진이 시스템을 거부하고 바깥으로 나간 후에야 비로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만있으라’는 명령만 되풀이하며 가장 먼저 탈출한 무능하고 악한 시스템이 개인의 생명을 보장하지 않을 때 ‘가만있지 않아야’ 살 수 있다. 이는 영웅의 출현을 원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지만, 연대를 요청하는 호소로 연결된다. 유시진이 ‘대기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강모연 구출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함께 작전을 수행한 동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들호는 침묵하는 개인들을 향해 침묵하지 않는 연대를 요청한다. 어린이집 교사 배효진을 변호하는 법정에서 조들호는 이렇게 외친다. “우리는 불과 몇 년 전, 침묵을 하면 모두가 함께 가라앉는다는 사실을 함께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호소하고 싶습니다. 침묵은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이 말은 붕괴한 시스템에서 탈출한 생존자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 또렷하게 보여준다.


'세월호' 이후 드라마가 그린 세상 (2) 공동체와 연대


두 번째, 공동체와 연대의 요청이다. 최근 한국 드라마에서는 혈연으로서의 가족이 아닌 비혈연-사회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시스템(바둑계)에서 탈락한 사회초년생 장그래가 다른 시스템에 적응하는 과정을 다룬 <미생>(tvN)은 부당한 시스템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연대를 그린 <송곳>(JTBC)으로 확장되어 <욱씨남정기>(JTBC)를 통해 직원들과 함께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옥다정과 ‘러블리 코스메틱’ 직원들의 작은 성취로 이어진다. 또한 <괜찮아, 사랑이야>(SBS)는 상처를 가진 자들의 공동체를, <착하지 않은 여자들>(KBS2)과 <디어 마이 프렌즈>(tvN)는 여성들의 공동체를, <풍문으로 들었소>(SBS)는 ‘갑’의 세계를 탈출한 ‘을’들이 만드는 ‘다양한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세월호 이후 내재한 무기력과 분노는 결국 (나를 포함한) 타인의 고통에 어떻게 연대하여 사회를 재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감각은 ‘기억’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미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시작된 무전으로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과거와 현재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미제사건을 해결해 가는 <시그널>(tvN)은 죽은 자들을 살려내기 위해 살아있는 자들의 ‘기억과 연대’를 통해 은폐된 진실에 접근한다. 드라마처럼 과거를 돌이켜 현재를 바꿀 수는 없지만 미제 사건, 즉 억울한 죽음을 해결하지 못한 과거는 결코 온전한 현재일 수 없다. 그것이 우리가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게 기억하고, 연대하려는 분투를 나는 ‘살아남은 자들의 소명’이라 부르고 싶다.


우리 곁의 ‘살해당한 영혼’을 기억하고, 직면하라


그 살아남은 자들의 소명, 즉 기억과 연대에 관한 주제는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는 이름의 셰어하우스에 사는 다섯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청춘시대>(JTBC)로 이어진다. 벨 에포크에 새롭게 합류한 유은재의 환영식이 있던 날, 각자 가지고 있는 비밀을 하나씩 풀어놓기로 하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며 깔깔거릴 때 송지원은 뜻밖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나 귀신 본다. 저 뒤에 있어.” 청춘 드라마가 오싹한 스릴러로 장르를 전환하는 순간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귀신이 있다’는 말을 들은 나머지 네 명의 반응이다. 송지원의 말을 취기 어린 헛소리로 흘려듣지도, 놀라지도 않는다. 다만 조용히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신발장을 응시하며 자신과의 연관성을 떠올린다. 유은재는 어린 시절, 아빠가 보험금을 타기 위해 아픈 오빠에게 약을 먹이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런 아빠가 병든 엄마에게 줄 물에 약을 타자 그 물을 아빠의 것과 바꿔치기했다. ‘취업해서 평범해지는 것’이 소원인 윤진명에게는 6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버티고 있는, ‘죽었으면 하는(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동생이 있다. 강이나는 사고 난 배에서 구조된 경험이 있다. 구조되기까지 물에 떠 있기 위해 꼭 필요한 가방을 두고 사투를 벌이던 또래 여자아이를 죽이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산다. “저 뒤(신발장)에 살해당한 영혼이 있다”는 말은 사실, 송지원의 습관적인 ‘구라’로 밝혀졌지만 그 거짓말을 통해 각자의 심연에 자리 잡은 “살해당한 영혼”이 구체화된 것이다. 

사랑하고 연대하라! 쨘!!!

<청춘시대>의 인물들은 각각 우리 사회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 배가 침몰하는 사고를 겪고 ‘살아남은 자’의 무게에 짓눌린 강이나는 세월호 이후의 우리를, 휴학을 밥 먹듯 하며 과외를 하고, 레스토랑과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겨우 생존할 수 있는 윤진명은 ‘헬조선’에서 ‘각자도생’ 해야 하는 청춘을, 전 남자 친구의 무시와 폭력에 던져졌던 정예은은 ‘우연히 살아남은’ 여성과 약자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그 청춘들뿐 아니라, 우리는 결국 누군가의 목숨에 빚진 삶, ‘살해당한 영혼’ 곁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벨 에포크’의 청춘들은 서로의 고통에 공명하고 연대하며 문제를 해결하지만, 드라마는 이들에게 온전한 해피엔딩을 허락하지 않는다. 강이나는 뒤늦게 제대로 살아보려 결심하지만, 자존감은 ‘하이힐’에서 ‘단화’로 하락했다. ‘길을 잃은 것 같다’는 윤진명은 전 재산 170만 원을 탈탈 털어 여행을 떠나지만, 막막한 현실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유은재의 비밀은 석연치 않게 마무리된다. 끊임없이 자신을 무시하며 바람을 피우던 남자 친구에게 이별을 고한 정예은은 결국 그에게 납치되어 폭행당한다. 그 사건 이후 그녀는 상담치료를 받으며 겉으로는 멀쩡하게 지내지만 사소한 것에도 그때의 공포를 떠올리며 두려워하게 된다. 드라마는 이들을 성급하게 위로하는 대신 불안과 상처가 아물지 않은 길 위에 그대로 둔 것이다. 나는 <청춘시대>의 결말이 지극히 현실적이라 생각한다. 누군가의 목숨에 빚지고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은 늘 ‘오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강이나와 함께 사투를 벌이다 죽은 여자아이의 아버지(오종규)는 “나 대신 아저씨 딸이 살았더라면, 뭐라고 할래요? 아저씨 딸한테”라고 묻는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살라고. 죄책감 같은 거 갖지 말고. 살아난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니까. 살라고. 잘 살라고. 그렇게 살아가라고.” 그 대답을 듣고서야 강이나는 그동안 꿈에서 자신을 심연으로 끌어내리던 손은 그때 죽은 여자아이의 손이 아니라 자신의 손이었음을 깨닫고 그 손을 놓는다. 결국 우리에게는 ‘살해당한 영혼’을 기억하고, 직면하고, 제대로 떠나보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제대로 장례를 치르라


우리 사회를 수식하는 많은 말이 이미 존재하지만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재난 사회. 세월호 이후 우리는 수많은 재난을 여진처럼 겪어야 했다. 이것은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지구적 현상이기도 하다. 리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현대 사회를 “갑작스레 닥치는 재난이건, 천천히 다가오는 재난이건, 재난이 훨씬 더 강력해지고 훨씬 더 일상화되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456쪽)고 평가한다. 또한, 그런 재난을 더 큰 재난으로 몰아넣는 것은 “야만적으로 대응하는 소수 권력자들의 태도”와 “낙원과 우리의 가능성을 알아볼 수 없게 하는, 왜곡된 거울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대중매체”(20쪽) 임을 폭로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재난 사회로부터 구원할 수 있을까? 그는 “이타주의와 연대”의 가능성을 말한다. 그 가능성을 우리 사회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까?


어느 사회의 성숙도는 ‘그날 이후’로 드러난다. 예기치 않은(혹은 예고된) 사건이나 사고는 피하지 못했더라도 그날 이후의 세상을 재구성하는 일은 그 사회의 수준만큼 진행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어떤 영역에서든 ‘가능성’이라는 말을 발견하려면 그 수준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목격한 현실은 정반대다. 세월호는 그런 우리 사회의 수준을 앙상하게 드러낸 예시였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우리 사회를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한’ 사회로 평가하고 싶다. 앞서 실컷 붕괴한 시스템을 향한 분노가 기억과 연대의 공동체적 가능성으로 이어졌다고 서술한 마당에 왜 다시 ‘도돌이표’인가 싶겠지만, 우리는 아직 우리 곁의 ‘살해당한 영혼’을 제대로 직면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 서둘러 그 죽음을 망각하고, ‘고통의 충분’을 말하며 기억하려는 이들을 외면한다. 마땅히 치러야 할 장례조차 (공) 권력에 의해 거부당한다. 살아있는 자들도, 죽은 자들도 존엄을 지키지 못하는 잔인한 ‘세월’이다.


이제 결론이다. <청춘시대>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고통을 끌어안고 헤매던 청춘들이 문제에서 풀려나는 계기는 단순했다. (비록 거짓말이었지만) “우리 곁에 살해당한 영혼이 산다”는 말에 반응하여 문제를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연대하는 공동체(‘벨 에포크’의 하우스메이트)가 있었다. 현실에 적용하자면, 한 여성과 젊은 노동자의 죽음에 공명하고, 끈질기게 ‘세월호 광장’을 지키며 기억하고, 사드 문제를 겪은 성주 군민들이 416 유가족과 연대하고, 416 유가족은 다시 백남기 농민 유가족과 연대하고, 그 고통과 무관해 보이는 개인들이 연대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기억하고 연대하는 과정 자체가 제대로 장례를 치르는 일이며 살아남은 자들의 소명이다.


-<말과활>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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