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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달빛 Jul 18. 2017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

초등학교 1학년 때 짝꿍은 나보다 두 살 많은 오빠였다. 오빠는 특수학교에 다니다 입학했다고 했다. 선생님이 왜 하필 나를 지목했는지 모르겠지만, 틈틈이 오빠를 살피며 옷에 오줌을 싼다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 이상 행동을 하면 선생님께 알려주는 게 짝꿍으로서 내 임무였다. 오빠는 착한 편이었지만 '손이 많이 가는' 어린이였다. 나는 그런 오빠가 귀찮았지만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오빠가 종종 깍두기 노트에 '오수경 좋아'라고 써서 보여주곤 했으니 그에게도 나는 괜찮은 짝꿍이었나 보다. 선생님이 1년 동안 짝꿍을 바꾸지 않은 걸 보면 비교적 무난하게 임무를 수행했던 것 같다. 그가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에게는 그저 ‘조금 귀찮은 오빠’였을 뿐이다. 다만 그를 어떤 이미지로 떠올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내 기억에서 소환되곤 했다.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의 저자 해릴린 루소도 비슷하다. 그는 여성 운동가이자 심리 치료사이며 작가이자 화가다. 책 표지를 장식한 자화상도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를 '대단하다'라고 여길 이유가 충분하다. 그런데 그는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라고 선언한다. 왜일까? 그를 설명하는 이력의 반쪽을 더 소개하겠다. 그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장애인 인권 운동가다. 뇌성마비는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장애다. 걸음걸이가 비틀리고, 표정이 일그러지고, 발음이 불분명하다. 그런 장애가 그의 사회적 활동을 불편하게 할지언정, 불가능하게 할 수는 없었다. 1946년생인 그는 누구보다 명랑하고 강한 내면을 가졌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열정적 운동가다. 이런 그에게 사람들은 "대단하다"라고 말한다. 해릴린 루소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 '대단하다'라고 여기는 것과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대단하다"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는 이 ‘차이’에서 비롯된 우리의 무지와 무례를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다.


우리에게 장애인이란 대략 두 가지 이미지로 공유된다. ‘장애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이겨낸 미담의 주인공이 되거나, ‘어쩌다가’로 시작하는 연민의 대상이 된다. 해릴린 루소는 그런 미담의 주인공이길 거부한다. 또한, 자신을 불쌍하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시선을 합리적으로 거부한다. “뭐가 잘못된 거니?”라는 무례한 질문은 “아무것도 잘못된 거 없어요. 당신은 뭐가 잘못돼서 그러는데요?”라고 받아친다. 물론 그렇게 하기까지 쉽지 않았다. ‘결함이 있는 아이’로 보이고 싶지 않아 ‘정상인인 척’ 하던 시절도 있었고, 거울에 비치는 추한 모습을 직면하기까지 노력이 필요했다. 그의 생애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장애는 내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들, 내가 특히 가치를 두는 부분들을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라고 고백하기까지 자신을 비롯한 사회적 편견과 투쟁하는 과정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분명 고통스럽고 슬플 거야’ 짐작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걱정하거나 대단하다고 여길 필요 없이 해릴린 루소는 누구보다 멀쩡하고, 유쾌하고, 성숙하다. 물론 그녀는 거부했지만, 이 책을 다 읽으면 그를 "대단하다"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추천한 정희진의 말처럼 "그녀가 대단한 이유는 우리가 시시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있는 그대로'에서 나온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극복의 서사를 쓰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타인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른다. 이 책은 "거울 속의 나"를 보지 못하는 우리를 위한 책이다. 


<복음과상황> 20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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