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다이어트의 성정치> 꽤 오래전에 나온 책인데 소문으로만 알고 있다가 몇 년 전 헌책방에서 구입한 후 이번에야 정독을 했다. 매우 얇아 출퇴근 길에 읽었다.
가뜩이나 살이 쪘는데 요즘 들어 살이 더 뽀드득 올라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최근에는 우울했다. 누군가 휴대폰 카메라라도 들이대면 놀라고, 여름이면 즐겨 입던 원피스도 올해는 못 입고 있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사람들 만나기도 무섭고 어디론가 숨고 싶다. 결국 "다이어트를 해야겠어" 결심한 후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고민을 이야기하니 대부분 "그래 잘 생각했다"며 흔쾌히 지지해주었다. 그 지지의 뜻이 내 결심을 존중하겠다는 건지, "그래 너는 빼야 해"라는 걱정의 표현인지는 모르겠어서 개운하지는 않다. 문득 몇 년 전 독하게 다이어트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울면서 살을 뺐다. 배고파서 울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내가 너무 비참해서 울었다. 목표 몸무게가 멀지 않았을 때 "여자는 살을 빼도 평생 관리해야 해"라는 말을 듣고는 아득하고 억울해서 울었다. 좌우지간 그렇게 살을 빼고 내가 들었던 말들은 나의 눈물의 분투를 어느 정도 보상해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묘했다. "이제 여자가 되었구나" "사실 그동안 걱정되었어" 등의 말은 '사회가 정한 평균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살을 빼고서야 첫 소개팅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 여자가 되었구나"라는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변한 태도에 맞춰 나도 변했다. 자신감이 생겼고, 그 어느 때보다 '나이스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은 정확하게 그 반대의 경우에 놓여있다. 거울을 보며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고 부정한다. 나이 많고 살까지 찐 나는 여자인가, 여자가 아닌가. 물론 누군가 승인해줘야 비로소 여자가 되는 건 아니겠으나, 무인도에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니 '세상의 기준'이라는 보이지 않는 거울과 틀에 나를 욱여넣으며 딱 들어맞지 않는 나를 혐오한다.
그렇다. 나를 가장 혐오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영화 <옥자>를 보면 미자는 옥자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친구로 여기지만 세상(미란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옥자는 등심, 안심 등의 부위로 인식되는 살덩어리다. 나는 옥자를 그렇게 부위별로 인식하는 걸 보며 내가 나를, 거울 속의 나를 인식하는 방법과 똑같아 너무 놀랐다. 미자가 어떤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대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국 다이어트란, 여성들의 자기혐오, 자기를 혐오하게 하는 세상의 인식과 산업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의 고민을 생산하게 하는 주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바도 그렇다. 저자는 처음에 자신의 일기를 인용하며 다이어트에 담긴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맥락들을 짚어낸다.
"목욕을 하고 나와 거울 앞에 서서 내 알몸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았다. 어느 한 구석, 세상의 기준과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는, 참으로 보편적이고도 불편하기 그지없는 몸이었다. (중략)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나 자신이 그것들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심지어 혐오와 인정의 상태를 넘어서기까지 할 수 있을까?" (8쪽)
"여성들에게 외모라는 주제는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문제가 된다. 하나는 여성의 삶과 자아 정체감에서 외모가 차지하는 지나친 비중이다. 외모의 위력은 여성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자원과 능력들이 지닌 가치를 너무나 간단하게 무화시켜왔다. (중략) 다른 하나는 여성 등이 외모의 힘을 간파하고 자신의 몸을 관리하면서 겪게 되는 심각한 고통이다. 여성들에게 '외모 관리'란 결코 간단하고 쉽게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철저한 자기 비하의 경험이고 자신의 욕망을 존중하지 않고 억압하면서 몸과 마음을 극단적으로 황폐하게 만드는 경험이기도 하다." (126-127쪽)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건, 저자가 인용한 일기는 1996년의 일기고 이 책은 200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맥락 속에서 쓰인 글인데 지금 읽어도 시의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이 주제는 영원한 것이며 오늘도 다이어트 산업은 불황을 모르고 팽창하고 있으며 그럴수록 우리는 결국 자기혐오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걸 '개인이 노력할 문제'에 머물지 않게 하자는 게 이 책의 주된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