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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 Sep 18. 2015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인생

『스토너』, 존 윌리엄스, 랜덤하우스코리아, 2015. 



 생애에 대한 가치 판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한 인생을 글로 써내려갈 때 ‘노력을 통해 업적을 이루었다’와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왔다’ 두 가지로 나뉜다면 과연 전자에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수 있을까. 소설 속 주인공인 스토너는 확실히 후자의 생을 살았다. 그의 인생은 노력했으나 되지 않은 일들로 점철되 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인생을 실패라고 부른다면 ‘최선을 다했으나 되지 않은 일들 투성이’인 우리 인생은 어떻게 부를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스토너』는 우리 자신의 인생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이 소설은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허무하게까지도 보일 수 한 인생 이지만 그 허무함이 인간 존재에 대한 불신, 부정, 냉소로부터가 아닌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연민을 조용히 불러일으킨다.

 특별한 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였지만 생애 내내 억지를 쓰지 않았으며 그저 묵묵히 최선을 다해 살 았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는 누구보다 열정 가득한 삶 이었을 수 있다. 죽음을 앞두고 ‘기쁨 같은 것이 몰려 왔다.’(390쪽)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생애는 아마 그러했으리라 생각한다.



그가 느리게 말했다.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는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잊으면 안 되네." / p. 54
그녀는 갸름하고 섬세한 얼굴로 주위 사람들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날씬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보이는 손가락이 능숙하게 찻주전자와 잔을 다뤘다. 스토너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정말로 서투른 인간임을 절감했다. / p. 68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처음으로 그녀와 둘이서 오랜 시간을 보내느 그해 12월 그날 저녁의 한 시간 반 동안 한 것만큼 그녀가 자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녀에게 그런 느낌을 갖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는 또한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확신했다. / p. 77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쓴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그가 책꽂이를 만들기 위해 낡은 판자들을 사포로 문지르자 표면의 거친 느낌이 사라졌다. 낡은 회색 표면이 조각조각 떨어져나가면서 나무 본래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더니, 마침내 풍요롭고 순수한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가구를 수리해서 서재에 배치하는 동안 서서히 모양을 다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 p. 143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대담하게, 종내는 자랑스럽게. / p. 159
"젊음의 서투름과 어리석음. 자네도 아마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워커는 다소 터무니없을 정도로 수줍음이 많아서 가끔 자기 방어적이다 못해 지나치게 자기주장을 내세우곤 한다네. 우리 모두 그렇듯이 그 친구에게도 나름의 문제가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그 심리적 동요에 입각해서 그 친구의 학문적 능력과 비판능력을 판단하지 않기를 바라네." / p. 192
"문학의 신비와 그 형용할 수 없는 힘과 마주한 우리는 그 힘과 신비의 원천을 찾아낼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무엇이 소용이 있겠습니까? 문학작품은 우리 앞에 측량할 수 없는 심오한 베일을 던져줍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다만 신봉자에 불과합니다. 그 베일이 흔들리는 대로 무기력하게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그 베일을 젖히고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며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손을 뻗을 만큼 무모한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들 중에 가장 강인한 사람도 약해빠진 미물에 불과하며, 영원의 신비 앞에서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  p. 197
그는 순전히 자기만의 즐거움을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려고 했다. 그가 수년 전부터 읽으려고 마음먹고 있던 책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그가 원하는 곳으로 이끌려 가려고 하지 않았다. 생각은 그가 들고 있는 책에서 멀어져 방황했고, 그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마치 그가 알고 있던 것들이 때로 머리에서 싹 비워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의 의지력이 모든 힘을 잃어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은 자신이 식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자신을 찔러 활기를 되찾아줄 뭔가를 갈망했다. 고통이라도 좋았다. / p. 251
스토너는 거의 매일 수업이 끝난 오후에 그녀의 집으로 왔다.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또 사랑을 나눴다. 아무리 놀아도 지치지 않는 아이들 같았다. 그렇게 봄날이 흘러갔고, 두 사람은 여름을 고대했다. / p. 273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 p. 274
"욕망과 공부." 캐서린이 한 번은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건 그것뿐이죠, 안그래요?" /  p. 278
"장기적으로 내다봤을 때, 날 이자리에 붙들어둔 것은 이디스도 아니고 심지어 그레이스도 아니오. 반드시 그레이스를 잃을 것이라는 사실도 아니지. 당신이나 내가 상처를 입을 것이라는 생각이나 추문 때문도 아니오. 우리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라는 사실 때문도 아니고, 어쩌면 사랑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도 아니오. 그저 우리 자신이 파괴될 것이라는 생각, 우리의 일이 망가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 / p. 303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 p.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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