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몽』,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예출판사, 2008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상의 이름은 '아쿠타가와 상'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그들끼리 최고 권위라 일컫는) 이상문학상이 되는 것이다. 이상의 문학에 대해서 나는 앎보다 무지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으므로 따로 이야기할 수는 없겠다. 어쨌든 우리나라보다 3-4배 정도 더 큰 규모의 일본 출판 시장에선, 대체로 그들만의 리그라는 불신과 무관심으로 점철된 이상문학상보단 더한 관심을 받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아쿠타가와 상인가?
일본에서 국민적 작가로 칭송받는 나쓰메 소세키를 수식하는 말로 ‘소설가가 없던 시절의 소설가’ 라는 말이 있다. 내가 느낀 범주 안에서 소세키의 글은 문학 그 자체에 대해 그가 취한 사조나 이념뿐 아니라 해학이고 재치까지도 겸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참 꾸준히도 문학적이었다는 생각. '국민적 작가, 일본의 셰익스피어' 라는 그의 가치를 증명해주듯 일본은 지폐에 나쓰메 소세키의 초상을 그려넣기도 하였다. (1984-2004)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그런 소세키의 제자였다.
그의 모친은 류노스케가 생후 8개월 때,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외삼촌 집에서 자라게 되며 어머니가 광인의 모습을 띄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감수성이 예민하고 심약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모친의 정신이상 증세 - 라는 트라우마로 인해 어머니의 광기가 행여나 자신에게 유전되지 않을까, 평생을 공포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동경제국대학 문과로 재학 중 발표한 단편 <코>가 나쓰메 소세키의 극찬을 받으며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인간 존재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섬세한 서정성을 한데 갖추었다는 평을 들었다.
그리고 35세, ‘막연한 불안’ 이라는 단어를 이유로 자살하였다.
왜 '나쓰메 소세키 상'이 아닌 '아쿠타가와 상'인가. 아쿠가와 류노스케가 나쓰메 소세키의 극찬을 받으며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하였고, 또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작가이기 때문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문학' 이라는 한정된 범주 내에서만 볼 때 확실히 아쿠타가와의 짧은 생은 강렬했다고 생각한다. 결정적으로 그와 관계를 맺어왔던 이가, 그의 자살 후 그의 이름으로 문학상을 만든 것이 그대로 '최고 권위'로 굳어진 게 아닐까, 싶지만.
나쓰메 소세키는 국민적 작가였다. 그러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대중적인 인지도 보다 문인들 사이에서의 평가가 더 후했으리라 본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상은 '모든 작가들의 작가'지만 국민적 작가는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국민적 작가로는 누구를 거론할 수 있을까. 신 모씨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씁쓸하지만...) 문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누구에게나 두루 읽히고 사랑받기보다 '문학적' 이라는 스펙트럼 안에서 더욱 고개가 끄덕여질만한 어떤 지점이 필요하기 때문인 것이라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코> (1916)
‘...인간의 마음에는 서로 모순된 두 가지 감정이 있다. 물론, 누구라도 타인의 불행을 동정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불행을 어떻게라도 극복하게 되면, 이번에는 그것을 바라보던 쪽에서 왠지 섭섭한 마음이 된다. 조금 과장하여 말하자면, 다시 한 번 그 사람을 같은 불행에 빠뜨리고 싶다는 마음조차 생긴다. 그리고 어느 사이에, 소극적이기는 하나, 어떤 적의를 그 사람에게 품게 된다...’
바라던 것을 이룬대도 결코 홀로 설 수 없는 인간. 끊임없이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타인의 시선은 족쇄와 같다. 실존적 생을 저해하는 요인의.
<두 통의 편지> (1917)
‘서장님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아는 바가 적은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서장님이 부리는 형사 중에서도, 서장님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전염병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그것이 입맞춤에 의해 급속하게 전염된다는 사실은 나 말고는 거의 아는 자가 없습니다. 이 예는, 능히 서장님의 오만한 세계관을 파괴하기에 충분하겠지요...’
환상 문학에의 시도. 실제로 류노스케는 도플갱어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해왔으며, 자살 전에 친구에게 보낸 서한에는 ‘얼마 전에 나의 도플갱어를 봤다’ 라는 내용이 있었다고도 한다. 도플갱어를 보면 죽게 된다는 그의 믿음을 이 단편에서는 여실히 확인할 수 있으며, ‘편지’ 형식과 소름 돋을 만큼의 결말의 여운은 마치 도플갱어라도 마주한듯한 놀라움과 공허함을 동시에 안긴다. 어떤 말로 이 단편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도플갱어를 봤는지 안 봤는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는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게 된다’ 라는 속설을 충분히 사실로 받아들였고, 어찌되었든 충분히 이행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업무에 태만한 서장을 종내엔 비웃듯, 도플갱어라는 소재를 휙 던져놓고 혼란에 빠진 독자를 비웃는 류노스케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지옥변> (1918)
“아무리 일예일능(一藝一能)에 뛰어나도 사람의 오상(五常:사람이 항상 지켜야 할 인의예지신)을 분별하지 못하면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
예술혼에 사로잡혀 눈 앞에 어떤 것도 관점을 가지고 볼 수 없는 주인공들을 많은 사람들이 여러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 접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류노스케의 서사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단순히 예술혼에 사로잡힌 인물의 고뇌만이 아닌, 그 인물을 절벽 끝까지 몰아붙이며 만들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하는 역할(작품 속 '대신'='독자')가 있는 것이다. 결말은 역시 지옥변을 완성한 다음날 목숨을 끊는 쓸쓸할 결말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어떤 인물이 선이고 또 악인지 들이댈 수 잣대는 매우 희미하다.
<귤> (1919)
나는 터널로 들어간 순간, 기차가 역방향으로 달리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면서 삭막한 기사들을 거의 기계적으로 훑어보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물론 소녀가 마치 비속한 현실을 인간으로 드러낸 것 같은 얼룰로 내 앞에 앉은 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었다. 터널 속의 기차와 시골뜨기 소녀와, 그리고 또 진부한 기사로 가득찬 석간...... 이것이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모든 것이 하잘것없다는 생각이 들어, 읽던 석간을 팽개치고 다시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 죽은 듯이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는 여전히 험악한 감정을 품은 채, 소녀가 부르튼 손으로 유리창을 올리려고 악전고투하는 모습을, 마치 그것이 영원히 성공하지 못하기를 바라는 듯한 냉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창밖으로 상반신을 내민 소녀가, 그 부르튼 손을 내밀고 힘차게 좌우로 흔드는가 싶더니, 가슴 설레게 할 정도의 따뜻한 햇살로 물든 귤 대여섯개가 기차를 배웅하는 아이들 쪽으로 어느새 날아가 흩어졌다.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리고 찰나에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지금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는 것일 터이고, 가지고 있던 몇개의 귤을 던져, 일부러 멀리 건널목까지 배웅 나온 남동생들의 노고에 답한 것이었다.
나는 이때 비로소 알 수 없던 피로와 권태를, 그리고 또 이해할 수 없고 저급하며 지루한 인생을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었다.
최근에 박범신이었던가 - 어느 강연에서 후배 작가들을 두곤 ‘한국 작가들은 스토리보다 문체에 더욱 신경을 쓴다.’ 라는 평을 했다. 문예창작과 출신 등단 작가의 한계를 염려하는 마음에 했던 발언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여러 부분에서 각기 다른 담론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냥, 나는 류노스케의 <귤>을 읽으면서, 아무리 스토리와 문체를 동시에 신경 쓴대도써 한국 / 일본을 통틀어 이만큼 짧고 간결하면서 작품성이 있는 단편은 써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분하지만.
앞서 인간을 바라보는 아쿠가와 류노스케의 시선이 날카롭고 예리하다 표현했는데, 그것은 그가 인간을 그리는 시선이 꽤나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기고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화자가 몸을 싣고 달리는 기차는 오로지 한 방향으로 달린다. 이제껏 인간을 바라보았던 주인공의 시선 또한 인간은 거추장스러운 존재, 혹은 탐탁치 않은 존재라는 일방향적인 시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르튼 손’의 소녀가 창 너머로 동생들에게 몇 개의 귤을 던지는 모습을 보며 다른 시선은 아니더라도, 이제껏 한방향으로 달리기만 했던 ‘그 시선’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이해할 수 없고 저급하고 지루하다고 했던 그 인생의 굴레로부터 잠깐 동안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생과 인간을 한없이 날카롭고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대도, 한 순간 스치는 정경을 통해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작가. 인간을 바라보는 한 일방향의 편견, 시선, 균열, 희망.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학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의혹> (1919)
“그 이후의 일은 말씀드릴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하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당일로 저는 광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어 가련한 여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과연 내가 광인인지 아닌지, 그런 것은 모두 선생님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설령 내가 광인이라 해도 저를 광인으로 만든 것은 역시 우리 인간 마음속에 잠재한 괴물 탓이 아닐까요? 그 괴물이 있는 한, 지금 저를 광인이라고 조작소하는 사람들조차 내일은 또 나 같은 광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류노스케는 작품 속에서 자주 인간을 시험대 위에 올린다. 그 안에서 어떤 선택을 독자로 하여금 종용하라 하기보다, 일상에서 좀처럼 할 수 없는 깊이 있는 사유를 통해서 저마다의 정의를 내리게 하는 힘이 있다. 결국은 선악과 도덕성을 뛰어넘어 인간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이끄는가. 선택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그는 상황과 환경만을 제시할 따름이다.
아쿠타가와의 작품을 읽는 내내 나는 자주 놀랐다. 흔히 근대기의 작가는 예술 사조, 혹은 이데올로기에 치우쳐 너무 어렵거나, 작가 본인의 자의식이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녹아있어 읽기가 거북스러운데 반해 아쿠타가와의 글은 그와 대척점에서 ‘그런 것들은 소설을 쓰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 고 말하는듯 느껴졌으므로. 고전에서 글의 제재를 가져온 초기작들부터, 절제된 분위기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들을 날카롭게 서술하는 현대작까지.
그가 유서에서 음독자살의 이유로 들었던 '막연한 불안'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이해할 수 없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내게도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다는 명분이 주어지는 셈이니까. 책을 모두 읽으니 그가 느껴온 불안은 내가 느끼는 불안보다 훨씬 추상적이다. 그 추상적인 힘으로 그는 자살이라는 극단적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선택을 할 수 있게된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느끼는 이 불안은 너무도 구체적이고 동시에 나약해서 오히려 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 생을 다잡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다시금 생각하건대, 추상적인 것은 힘이 세다.
주관적으로 아주 뛰어난 소설을 발견할 때, ‘왜 나는 이 소설을 이제서야 읽은건가!’ 나지막히 통탄하게 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에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게 입체적인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보이는 면들만 볼 수 있었을 때) 읽었다면 그의 소설 전반에 깔려있는 어두움과 작가의 예리함에 불편함만 느꼈을 터. 이렇듯 한 작품, 작가, 세계를 만나기까지 나는 꽤 오래 단련되어야만 했다. 생의 경험들로써, 이제껏 쌓아읽어온 책들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