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 마티니 - 얼음을 채운 믹싱 글라스에 드라이 진 2oz, 드라이 베르무트 1/3oz를 넣고 젓는다. - 마티니 글라스에 얼음을 빼고 따른 뒤 올리브로 장식.
"Martini. Gin, not Vodka obviously, stirred for 10 seconds while glancing at an unopened bottle of vermouth."
"마티니. 보드카 말고 진으로, 따지 않은 베르무트를 쳐다보며 10초간 저어서."
-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에그시의 마티니 오더
어둡고 조용한 공간 속 드물게 놓인 조명. 느린 재즈와 유리잔 소리. 비스듬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던 바(BAR)라는 공간에 내가 처음 발을 들였던 것은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스물일곱 무렵이었다. 그리고 '처음'이라는 부사는 뒤따르는 수식어가 무엇이든 대개 그것을 빛나게 한다.
겨울이 시작되던 정자동 골목의 한 작은 바는 무겁고 커다란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치 외부인을 썩 반기지 않는다는 듯. 그런 문을 여는 데는 나름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배웠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입구에 들어서자 길쭉한 원목 테이블 앞으로 여덟 개 남짓의 스툴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잔을 닦던 바텐더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나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다닐 만한 통로를 따라 조심스레 발을 옮겨 적당한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마주한 벽면에는 형형색색의 술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병들은 저마다의 신원이 적힌 라벨을 가슴팍에 붙인 채 은은한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중세 박물관의 오랜 유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텐더는 테이블 위로 물 한 잔과 따뜻한 물수건을 건넸다. 그리곤 메뉴판이 따로 없으니 원하는 술이나 스타일을 얘기하면 그에 맞춰 준비해 주겠다고 덧붙였다. 앞서 마주했던 굳센 철문의 인상과는 달리 무척이나 친절한 태도여서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애초에 무엇을 마시겠다는 계획 없이 들어왔기에 한편으로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냥 독한 걸로 달라고 할까, 싶던 참에 문득 떠오르는 칵테일의 이름이 하나 있었다. 바로 마티니였다.
스크린 속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그녀에게 반한 말끔한 슈트 차림의 남자. 역삼각형의 투명한 글라스와 핀에 꽂힌 올리브. 내가 마티니라는 칵테일에 가지고 있던 어렴풋한 이미지였다. 물론 친구들과 몰려간 펍에서 몇 번인가 맛본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단지 '쓰다'는 것 외에 별다른 감상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완벽한 마티니 레시피에 대한 다음과 같은 유머가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대중적으로 인기를 누리기는 쉽지 않은 칵테일인 것 같다.
퍼펙트 마티니 레시피 1. 진, 베르무트, 올리브를 원래 있어야 할 곳인 쓰레기통에 부어버린다. 2. 위스키를 마신다
내 주문을 듣자 바텐더는 곧장 뒤편의 선반에서 두 병의 술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잘 다듬어진 커다랗고 투명한 얼음 하나를 집어 믹싱 글라스에 담았다. 다음으로 모래시계 모양의 계량컵에 술을 차례대로 따라 붓더니 길쭉한 바 스푼을 집어넣고는 일정한 속도로 휘젓기 시작했다. 언젠가 TV에서 본 낯선 나라의 종교의식처럼 우아하고 또 섬세한 동작이었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스푼이 유리잔을 타고 도는 오묘한 소리와 스피커로 전해지는 재즈만이 바 안에 나지막이 울렸다. 이 정도면 술맛은 좀 아쉽더라도용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단숨에 그 공간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어느덧 테이블에는 김 서린 잔에 담긴 투명한 칵테일과 싱싱한 올리브가 놓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잔을 들었다. 그리고 한 모금을 넘긴 뒤 코로 얕은 숨을 내쉬어 보았다. 그때 입안으로부터 목덜미와 콧등까지 퍼지던 풍미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처음 맛보는 이국의 과일이나 채소처럼 낯선 쌉싸름한 향기가 가득 퍼졌다가, 기분 좋게 쨍한 알코올의 향이 그 뒤를 깔끔하게 씻고 지나가 버렸다. 마치 집에서 종종 타 먹던 믹스커피나 학교 매점에서 사 먹던 캔커피가 커피 맛의 전부인 줄로만 알던 어린 시절, 처음으로 카페에서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맛봤을 때와 같은 생경함이었다. 밸런스가 괜찮은지 묻는 바텐더에게 나는 조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이게 마티니로군요.
이제는 어느덧 바를 찾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술꾼이 됐다. 이런저런 칵테일들을 접하면서 취향도 때에 따라 변하곤 했지만 나는 여전히 첫 잔으로 마티니를 청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처음 방문하는 바에서는 예외 없이 그렇다. 첫 방문에 첫 잔으로 마티니를 주문하는 손님이 자칫 까다로운 이미지로 비칠 수도 있다는 생각 탓에 괜스레 '아무 진(Gin)으로나 대충 만들어 주세요.', 하는 말까지 덧붙여 가면서. 어쩌면 그건 동경하던 것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경험해 나가던 시절에 대한 막연한 향수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