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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윤 Nov 06. 2015

지워낸 날들의 이야기

지워낸 날들의 이야기




4.


기숙사는 점점 더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학기 시작이 열흘 쯤 남았을 때부터는 학생들이 하루에도 몇 명씩이나 들어왔다. 주로는 식당에 모여서 밥을 먹다가 말을 걸게 되고, 통성명을 하고,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친구들이 또 친구들을 소개해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가용 차를 가진 학생 몇몇과 알게 된 뒤로는, 그 친구들의 차를 얻어타고 좀 더 멀리까지 가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도시와 다리로 연결된 지역의 한 바닷가를 즐겨 찾았는데, 모벤픽이라는 그곳의 아이스크림 가게가 매우 유명해서 저녁 식사 후 후식으로 자주 생각났고, 또 바닷가가 많이 붐비지 않아 산책하기에도 좋았기 때문이다. 금요일 저녁의 기숙사 파티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난 어느 날에는, 서로서로 들뜬 마음에 잠자리로 가는 대신 모포와 이불 등속을 챙겨 바닷가로 향하기도 했다. 차가운 백사장에 이불을 둘러쓰고 모여 앉아 별을 보며 수다도 떨고 파도 소리와 함께 밤을 지새웠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도 피아노실을 이용하려는 학생은 많지 않아서, 나는 여전히 매일 오후 몇시간을 피아노실에서 보낼 수 있었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피아노를 치고 있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한 동양계 남학생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나 또한 동양 여자아이이기 때문에 보통 동양계 사람을 만나면 어느 나라 출신인지 즉각 알아볼 수 있었지만 이 남자아이는 도무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곱슬곱슬한 파마머리에 평균보다 조금 큰 키,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고 작은 두 눈에는 약간 피곤한 기색을 띤 채 그는 곧바로 내게 물었다.


- 방금 피아노 네가 친 거니?


말투는 나라 특유의 악센트가 전혀 없이 오히려 정식 영국 영어에 가까운 쪽이었고, 내게 영어로 말을 거는 것을 보아하니 한국인은 아니구나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옷차림이나 장신구나 화장법이나 어딜 봐도 한국인 여자아이처럼 생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맞아.


- 꽤 잘 치네. 쇼팽을 치는 사람은 오랜만에 봐. 반가워, 나는 준이라고 해.


- 응, 내 이름은 H야.


- 나는 베토벤을 연습하고 있어. 여기 둔 악보 말야. 나는 너처럼 쇼팽은 잘 못 치겠어. 어릴 때부터 배우지 않아서 손가락 놀림이 부드럽지 않거든. 물론 베토벤도 힘들지만, 쇼팽보다는 덜 해서 간신히 흉내는 낼 수 있는 것 같아. 아무튼 만나게 돼서 반갑다. 사실 며칠 전부터 소리가 들리길래 궁금하기는 했었는데 내가 주로 낮에는 자고 밤에 깨어있는 편이라 만나기가 어려웠네. 오늘은 방금 일어났는데 마침 소리가 들려서 바로 와봤어. 그럼 또 보자.


그것이 내가 궁금해하던 베토벤과의 첫만남이었다. 나중에 우리는 이 첫만남을 떠올리며 종종 웃곤 했는데, 그나 나나 둘 다 한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모르는 채로 물어볼 생각도 않고 며칠간은 계속 영어로만 대화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나를 보고 한국인이라는 것을 몰라볼 수가 있냐고 내가 묻자, 자신은 어릴 때부터 이곳에서 쭉 살아왔던 데다 한국인 친구들하고는 전혀 어울려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고 그는 대답했다. 여하간 나는 그 날 이후로 곧 준과 친해지게 되었고, 우리는 세 명의 여학생과 한 명의 남학생으로 인원이 늘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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