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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판화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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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윤 Sep 10. 2015

전설

전설




석양에 바람이 쏟아진다. 그가 서 있는 자리는 구두 뒷굽이 없는 자리이다. 대지 위 독실하고 순진하게 다듬어지는 하루. 진실한 노동의 댓가로 발자국은 꼬인 위치로 떠내려가고 이마에는 물빛 전생이 맺힌다. 약음기를 단 규칙적인 패턴들. 손에 쥐인 물음은 오래도록 묽고 순하다. 세월은 견고한 눈썹 아래 경도된다. 그 눈동자 뒤편 전설처럼 간직되는 연두빛 새벽.

자정의 스위치를 올린다 베개 밑에 심긴 어린시절은 머리카락을 타고 천 갈래로 사윈다 그래도 밤을 접을 땐 언제나 한쪽 귀퉁이에 그날의 퇴적을 표시해두었었다 몇 쌍의 평행한 별자리가 고대 문자 같은 손금 사이로 돌다 사라진다 늙은 지표를 달래는 잠의 단면 그 음각된 장면 안에서 많은 소중한 일들이 일어난다 모든 무난한 사람으로부터 그 사람이어야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공들인 여백 끝자락에 다시 삶을 빗긴 해가 진다. 안부를 잉태한 투명한 패턴들이 풍경에 번지듯 박힌다. 발목에 잠기는 석양은 두서없이 긴데 늘어뜨리는 손에 잠시, 이방이 스친다. 마음이 감긴 눈을 하고 모두가 세계의 끝을 바라보는 시간. 직감은 정결하고 아늑하다. 첫날밤은 선물처럼 왔지만 마지막밤은 회화처럼 갈 것이다. 

아주 먼 운명이 되돌아오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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