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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곰 Apr 03. 2022

잠들지 못하는 자들의 시간과 공간의 아파트

(1)

                                                                                                                                                               

음, 음, 음, 또 벽을 따라 소리가 울렸다. 핸드폰 진동 소리만으로도 옆집에서 나는 것이 알람인지 전화 벨소리인지를 구분해낼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얄팍한 벽이 두 집을 구분 짓고 있기 때문이었다. 테라스의 한쪽 벽면은 비상시 탈출을 위한 벽면이라 합판 정도의 두께에 불과했다. 이 집으로 이사한 지 1년이 되어가는 요즘, 멘탈의 두께가 점점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고 느꼈다. 

 이내 옆집의 진동 소리가 멈췄다. 며칠 전 사건이 있던 이후 옆집에서 처음 들려온 소리였다. 그녀는 이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기 위해 저녁 시간 전화도 받지 않게 된 모양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늦은 시간은 아니지 않나, 싶어 시계를 보자 이미 밤 11시 반이었다. 서둘러 유튜브로 틀어놓았던 카페 뮤직 채널의 소리를 줄이고, 쓰고 있던 신춘문예 원고의 파일 창을 종료했다. 

소리는 내가 타인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갖고 있는지 알게 해주는 척도다. 내가 적정하다고 판단하는 기준과 상관없이 소리는 나의 위치를 깨닫게 해 준다. 내게 닥치는 소리의 위치와 방향, 소리의 크기와 세기, 소리를 차단할 수 있는 환경 내지는 능력이 나의 사회적 위치를 분명하게 깨닫게 했다. 

소리가 내 생활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은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졸업 후 간신히 취업한 회사의 동료와 상사, 거래처와 기관의 행정 직원들과 매일 같이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지만 정작 목표와 가치는 공유되지 못했다. 끝없이 쏟아지고 이어지는 말들은 방향성을 갖고 있었고,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를 했다. 먹이사슬 최하단의 풀과 같은 존재, 막내였던 나는 그 소리들의 쓰레기통 역할을 했다. 감정의 쓰레기통이기도 했다. 나는 내게 쏟아지는 고함과 명령, 관례로 위장한 불합리하고 불법적인 요구들을 끊어낼 수 없었고, 그럴 주제도 없었다. 요즈음에는 뉴스에 왕왕 오르내리는 일들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일종의 문화로 작동했었다.

결국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다며, 퇴사 후 꿈을 찾겠다고 다시 대학원에 진학해 버렸다. 그곳에서 나오게 되면, 더 이상 회사를 다니지 않게 되면,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면 좀 더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공부와 아르바이트에만 전념하던 시절에는 졸업장을 따는 데만 급급했다. 졸업은 순식간이었고, 소속이 사라지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보호막이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어떤 안전망도 없었다. 회사로 돌아가기에 삼십 대 중후반은 회사에게도, 나에게도 영 부담스러운 나이였다. 결혼과 육아도 아닌 경력 단절은 부적응자로 인식되기 쉬웠다.

그때만 해도 이 낯선 도시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다. 대도시에서 근교로 넘어가는 경계마다 우후죽순 아파트들이 자라났다. 임대 아파트는 도시의 경계를 말해주는 신종 성벽 같았다. 신도시의 알짜배기 땅을 빗겨나가는 한적한 도로의 경계, 특히 산 아래 딱딱한 형태의 아파트들이 즐비했다. 아파트의 이름에는 하나 같이 해와 달과 산과 강과 별과 나무 같은 고운 풍경이 들어 있지만, 그 글자의 모양새나 아파트의 디자인 역시 그것들을 조금도 드러내지 못했다. 

내가 살고 있는 행복 주택도 이 신도시의 가장 북부, 산 아래 버스 종점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끔 안개라도 끼는 날이면 그것이 구름인지 안개인지 알 수 없어, 현실감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사진을 찍어 메신저로 친구에게 보내면 실화임? 신선임? 같은 답이 오는 그런 곳이었다. 이 도시에 어떤 연고 따위가 있어 온 것은 아니었다. 나의 연고는 국가가 정해주었다. 그저 행복주택이 됐기 때문에 이 아파트에 들어온 것이다.

5평 남짓한 이 아파트에 입주한 후, 집을 들여다본 가족과 친구들은 걱정을 했다. 30대 중반이 살기에는 너무 좁다고들 했다. 나는 그 말에 지지 않으려 몇 번이고 지치지 않고 대답했다.

“삶의 규모에 맞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했어.”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삶의 규모가 공간을 제한하는 것은 일종의 불행이었다. 기숙사, 고시원을 개조한 셰어하우스, 촌수만 가까운 친척집 등등을 전전하며 좁아터진 곳에서 여러 사람과 지내본 후 깨달은 것이었다. 공간이 삶의 규모와 사유의 규모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20km 반경에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아파서도 안 되고 다쳐서도 안 된다. 본가는 200km 이상 떨어진 거리에 있다. 잘 살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보호할 안전장치가 없기 때문에 잘 살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가오는 모든 것에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으므로, 이곳에서의 삶도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계속 피로감과 편리함이 뒤섞인 생활의 연장선이었다. 

그나마 애인이 있을 때는 그가 보호자를 자처했다. 기숙사를 벗어나 새로운 집을 구해야 할 때는 한 푼도 없었고, 결혼에 대한 생각이 그때만큼 절실했던 적도 없었다. 집 없는 애인과 나의 데이트 장소는 거의 모텔이었고, 숙박업소라면 진저리가 났다. 그는 내 몸이 그의 집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 거친 세상에서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라고 속삭였다. 내 몸도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데. 나는 집을 말하는데 그는 사랑을 말했다. 밤이면 수많은 불빛이 빛나는 이 도시에 몸을 뉘이고, 불 하나 켤 곳 없다는 것이 어떤 공포인지, 그는 몰랐다. 고향이 서울이며, 부모와 함께 살던 그는 청약 통장도 개설해 본 적이 없었다. 주어진 귀결은 헤어짐뿐이었다. 끝은 깔끔하지 않았다. 1년 동안 지지부진하게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다 끝났다.

그 뒤로 내 쉴 곳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집중했다. 그 뒤로, 주택공사들의 공고에 인터넷 청약을 쉬지 않고 넣은 결과, 기적적으로 도시 근교의 행복주택에 당첨되었다. 입주 전까지도 이 집 저 집을 전전했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견딜 수 있었다.  

몇 개월을 지나 행복 주택에 처음 들어가던 날, 행복을 느꼈다. 5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 벙커 침대 3대를 놓고 살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참 자유였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낀 행복이었을 것이다. 입주한 날, 가스 설치기사가 쿡탑 아래 서랍에 휴대용 가스누출감지기를 놓고 간 것을 깨닫기 전까지. 경비실에 가스누출감지기를 남겨두고 오면서, 그가 별다른 의도가 없었을 거라고 스스로 되뇌며 웃었다. 재밌는 일이야, 설치기사가 감지기를 놓고 가다니, 다른 집에서는 곤란해서 대체 어떻게 일했으려나? 하하. 웃기지도 않는데 소리를 내서 웃었다.

태어나 한번 와본 적도 없는 도시에 이사를 왔지만, 출퇴근 왕복 4시간이 걸리는 회사와의 계약 기간이 몇 달 남아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집 근처를 탐색하는 것은 사치였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으면, 잠을 자는 게 나았다.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은 날들이었다. 

당연히 소리가 다시 생활을 잠식해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 쪽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입주한 지 몇 달이 채 안됐던 날이었다. 현관문 앞에 쪽지와 무언가 들어있는 큼직한 봉투가 있었다. 소음 때문에 살 수가 없으니 제발 이 슬리퍼라도 신고 다녀달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6시에 일어나 출근하고 집에 도착하면 거의 9시였다. 야근이라도 한 날은 11시에 들어와 씻고 잠드는 것이 다인데, 일단 글씨를 보니 여자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더욱 걱정이 되었다.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상황이 이러하니, 아랫집에 사시는 분의 성별만이라도 좀 알 수 있겠느냐 물었다. 남자예요, 그 말에 일단 알겠다고 하고 들어오는 또 다른 전화를 받았다. 얼마 전에 뒤늦은 집들이 선물을 보낸 친구 효정이 택배가 도착했는지를 물어왔다. 쪽지와 슬리퍼라는 단어만 듣고는 어머어머를 연발하던 효정은 그 내용을 듣자마자 싸하게 식었다. 

“야, 절대 너 아랫집 혼자 가지 마. 알았어?” 

“그럼 어떡해. 받는 것도 찝찝해. 돌려줘야 할 거 아니야.”

“전에도 경비실에서 전화 왔었다며. 따로 만나면 안 돼.”

이사 온 지 두어 달도 안 되어 너무 시끄럽다는 전화를 받은 일이 있었다. 기껏해야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자는 일이 다인데, 관리사무소에서는 특별히 아랫집에서 나를 지목했다. 운동은커녕 앉아있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소연했지만, 관리소에서는 일단 민원이 발생했으니 전달하는 겁니다, 라는 태도를 유지했다. 조율이 아니라 통보를 위해 전화한 셈이었다. 내가 층간소음의 주범으로 지목되다니. 자동문 앞에서조차 존재감이 없어서 문이 잘 열리질 않고, 걸을 때도 큰 소리가 나지 않는 내가 아니던가. 인기척이 별로 없이 다녀 동료들도 나를 보고 갑자기 놀라는 일도 많았다. 주로 내 뒷담을 하고 있는 직원들 뒤에 조용히 서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큰 소리에 민감하고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큰 소리를 내는 일도 좋아하지 않았다. 

 관리소에서 전화를 받은 뒤로 발 도장 소리가 나지 않게 슬리퍼를 신고, 살금살금 걷고, 집에 놀러 온 친구들에게도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고 잔소리했던 것이 여러 번이었다. 이 좁아터진 집에 위, 아래, 옆 어디서 시작되는 것인지 불분명한 소음의 진원지들을 끌어안고 사는 것은 저렴한 임대료 대신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층간소음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것은 계산에 없었다. 얼마나 더 없는 사람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 아예 없어지라는 건가. 나는 효정에게 말했다.

“일단 끊어봐. 관리실에 가서 아랫집 나오라고 해서 돌려줘야 할 것 같아.” 

“그래, 그래. 너 혼자 가는 건 절대 안 돼. 알았지?”

“알았어.”

나는 관리실에 연락해 아랫집을 불러냈다. 30분쯤 뒤에 보자고 한다는 말을 관리소로부터 전해 들은 나는 집에서 기다리는 동안 몇 가지를 시뮬레이션했다. 싸움은 기세라고 했건만, 내 목소리는 축축한 붕어빵처럼 물렁하게 들렸다. 어차피 마스크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도 않겠으니 아이라인을 그리면 싸움을 잘하게 보일까. 30분을 기다리는 동안, 물렁해 보일까 봐 출근 복장도 갈아입지 못했다. 

마음과는 달리, 슬리퍼가 든 봉투를 챙기며 집에 있던 과일즙과 간식 같이 뇌물이 될 만한 것들을 바리바리 종이가방에 넣어 담았다. 어차피 아래층이면 집 형태가 똑같을 것이었고, 그 얘기는 아랫집 역시 대학생이거나 나와 비슷한 또래인 사회초년생이자 1인 가구일 터였다. 먹는 게 거기서 거기니, 과일즙 같은 게 나을 것이었다.      

아파트 관리 사무실에서 도착해서는 당직 직원인 중년 남자와 마주 서서 쭈뼛거리고 있었다. 묘하게도 당직 직원이 중년의 남자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얘기를 잘해보라며, 슬쩍 발을 빼는 말만 하는 직원과 그에게 지푸라기라도 하나 걸치고 싶은 나 사이에 침묵만 흘렀다. 아랫집 남자는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오지 않았다. 30분이 지나자 손목시계의 초침만 보는 사이, 가슴속에 있는 풍선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점점 더 부풀어 올라 몸통을 다 채울 것처럼. 그때, 문이 열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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