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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곰 Oct 07. 2022

다정한 씨앗이 숲을 이루면

스물둘, 몸이 아파서 휴학을 했다. 하루 학교를 나가면 이틀은 쉬어야 했다. 온몸이 아팠고, 잠을 잘 수 없었다. 자주 응급실을 드나들었지만 이렇다 할 원인을 찾지 못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던 중 한 내과의사는 신경정신과 방문을 추천했지만, 지금처럼 상담을 받거나 약 처방을 받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시절은 아니었다. 몇 분 정도의 문진 끝에 의사는 다른 사람보다 우울감이 다소 높을 뿐 우울증은 아니라고, 울고 있던 어머니를 위로하며 나에게 ‘해피 필’을 처방해주었다. 나는 그 약을 다 먹지도, 다시 병원에 가지도 않았다. 


일 년 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밖에서는 나름의 활동을 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집에 돌아오면 방안에 처박혀 온종일 누워 있곤 했다. 밤이 되면 이불을 입 속에 쑤셔 넣고 소리 없이 울었다. 내가 쓸모없게 느껴졌다. 진로에 대한 고민은커녕 그저 눈앞의 수업, 과제처럼 당장 눈앞에 닥친 일만 간신히 해결하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하지만 짧은 고전 비평문을 쓰는 수업만큼은 아주 좋아했다. 과제를 위해 글을 쓰는 동안에는 다른 것들을 잊을 수가 있었다. 그 수업의 담당은 젊은 여교수님으로, 대체적으로는 침착하지만 유쾌했고, 그 속에는 날카롭고 강인한 에너지가 있었다. 어느 날부터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내 비평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칭찬이 불꽃놀이처럼 터질 때도 얼음송곳 같은 날카로운 지적이 있을 때도 있었다. 내 생각을 계속해서 묻고, 가만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흩어진 의욕을 끌어모으고, 가진 에너지를 탈탈 털어 비평문을 열심히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이 끝날 무렵 교수님이 나를 불렀다.

“수업 끝나고 연구실로 와.”

“저요?”

교수님은 끄덕이며 나갔고, 뜻밖의 부름에 내가 또 뭘 잘못했을까부터 생각했다. 얼떨떨하게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 어버버 하며 교수님 앞에 마주 앉았다. 

“이제 곧 졸업인데, 앞으로 계획이 있어?”

“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긴장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매만지고 있을 때, 교수님이 예상치 못한 말을 건넸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너는 글을 써라.”

“예?”

“너는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야. 그게 무슨 글이 됐든지.”


그 말은 순간 엄청난 열기로 내 가슴속에 낙인을 찍었다. 도대체 그 말을 내게 해 준 의도나 근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선명한 문장들이 내 안에 찍히는 동안 나는 엄청난 연기 속에 갇혀버렸다.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숨겨진 재능이 폭팔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글쓰는 일을 피해 다녔다. 나이를 좀 더 먹어가면서는 재능도 재력도 체력도 없이 새로운 일에 무슨 수로 다시 도전할 수 있을까 의심했다. 대부분은 글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일들을 겸했다. 


그러나 그때 심겨진 말들이 나를 다시 그 길로 이끌었다. 글만큼은 혼자서도 계속 쓸 수 있었다. 우는 날이 줄었고, 아픈 날도 줄었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는 순간에도, 내게 의미 있는 누군가의 확신이라면 믿고 싶어졌다. 읽어주는 이 하나 없이 계속 해서 썼다. 그러다 어느 날 누군가 읽어주었고, 그렇게 극작가가 되었다. 작가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자욱하던 연기 속을 빠져나왔다.


얼마 전, 수년을 고생하며 공연한 희곡들을 모아 첫 희곡집을 내게 되었다. 출판사에서 보내준 증정본을 정리하며, 고향에 우편을 보낼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 교수님이 첫 번째였다. 나는 표지를 넘겨 그 교수님에게 인사말을 쓰려다 그 어릴 적의 기억을 적어 보냈다. 며칠 뒤, 한 통의 문자가 도착했다. ‘이 책에 그렇게 오래된 기억을 언급해주다니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교수님은 그 시절의 대화는 아주 까마득하게 잊고 계신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다정한 한 마디가 어떻게 길을 찾게 하고, 자리를 잡게 하고, 열매를 맺고, 어떻게 숲을 이루어 가는지. 다정한 말이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기분을 달래주는 달콤한 말이 아니라, 나조차 알아채지 못한 내 생각을 헤아려 주는 말, 나를 믿어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꿈을 이루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내게는 누군가의 다정한 말 한 마디 덕분에 그림자 속에서 볕으로 나가는 경험을 가진 인간으로 자랄 수 있었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나를 향한 믿음과 그 믿음을 나도 믿어보고 싶다는 마음 덕분에 밑바닥을 치며 허덕일 때마다 다시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다정한 말과 믿음이 실린 말의 힘을 믿는다. 학생들을 대할 때, 빈종이 위에 글을 적어 내려갈 때, 사람들과 대화할 때 종종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말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고. 서로의 마음에 씨앗을 심는 중이라고. 그래서 그것이 어떤 열매를 맺고 숲을 이루어 가는지를 지켜봐야 한다고. 


<월간 에세이 2022. 5월호>


https://www.essayon.co.kr/kr/

*이 글은 월간 에세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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