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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들 Jan 02. 2023

언니에게

슬픔에 힘에 대한 이야기


벗은 발로 집안을 걸었더니 발바닥이 시리네. 창을 열면 바싹 마른 찬 공기가 집으로 흘러들어. 며칠 전이 절기로 치면 ‘한로’였대. 찬 이슬이 내리는 때. 고개를 빼 창밖을 내다보면 청명한 하늘 아래로 걷는 다양한 보폭과 복장을 가진 사람들이 보여. 털옷을 입은 사람과 반팔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나란히 걷는 장면을 보면서 계절이 바뀌었다는 걸 실감해. 그럴 때면 숨을 깊게 들이쉬고 길게 뱉어봐. 바삭한 소리가 날 것같이 건조하고 깨끗한 냄새. 감겼던 눈을 천천히 뜨면서 생각해. 가을이구나, 거짓말처럼. 그러고 나면 아무것도 젖지 않은 이 풍경과 멀리 떨어진 시간에 있는 것 같은 광경들이 떠올라. 그러나, 실은 하나도 멀지 않은 광경들이.

 

올해 여름은 유난히 무덥고 습했던 것 같아. 눈 뜨면 ‘오늘의 날씨’부터 확인하면서 폭염이라는 글자나 빗방울 모양의 그래픽이 보이지 않기를 빌었지. 그런 바람이 무색하게도 많은 날이 뙤약볕 아래에서 녹고 쏟아지는 빗줄기에 잠겨버렸어.

 

8월 중순쯤이었어. 엄마한테 문자가 왔더라고. ‘오늘 출근하니?’ 역대 최고를 기록할 만한 수준의 비가 쏟아질 거라는 예보가 있었거든. 엄마의 물음을 시작으로 그날의 메신저는 대부분 날씨 얘기로 채워졌어. 왕복 3시간 거리의 회사를 오가는 대신 재택근무를 하게 된 친구의 춤추는 이모티콘이나, 축축한 전철 바닥 위로 장화를 끌며 출근하는 언니의 ‘k-직장인은 출근 못 참지~’ 같은 메시지들로. 우리가 욕설을 뱉고 지구의 미래에 대해 잠깐 비관하고 금세 다시 농담하는 동안 아가리를 벌린 하늘은 한시도 쉬지 않고 비를 쏟아부었어.

 

몇 시간 뒤부터 SNS에는 서울의 정경이 찍힌 사진과 영상들이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했어. 개중에는 수영모를 쓰고 물이 차오른 길 한복판에서 팔다리를 휘젓는 사람의 모습이 담긴 게시물도 있었어. 우리 그런 거 좋아하잖아, 해학이나 풍자 같은 거. 그런데 그날의 우리는 평소보다 웃음에 인색해졌어. 왜냐하면, 그걸 보는 순간까지도 비가 쏟아지고 있었거든. 무시무시하고 태평하게.

 

뉴스에서 보도가 이어졌어. 도시의 땅 아래에 깔린 배수시설의 기능이 마비됐대. 물이 아래로 빠져나가지 못해서 압력이 너무 높아진 나머지 맨홀 뚜껑이 튀어 오르고 있대. 택시를 잡지 못해 걸어가던 어떤 시민이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대. 그런 사람이 한 명, 두 명, 세 명이래. ‘서울 역대 최고 일일강수량 381.5mm’ ‘서울 역대 최고 일일강수량 381.5mm’ … 똑같은 제목을 단 기사들이 장대비처럼 쏟아졌어.

 

메신저에서는 웃음을 거둔 말들이 오갔어. 안부를 묻는 메시지에 서로의 답이 늦어지면 불안해하고, 여긴 아직 괜찮다는 답장을 주고받을 때까지 취침을 미뤘어. 그러는 동안에도 비는 멈추지 않았어. 창문에 부딪고 흘러내리고 다시 부딪고 흘러내리는 집요한 비의 모양이 징그러웠어. 나의 가족과 나의 친구와 내가 안전한 채로 잠들 수 있어서 다행스럽다며 눈을 내리감던 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몸소 겪고 있을 위험과 죽음을 상상할 수 있던 밤, 그런 밤이었어.

 

나라 땅의 1/3이 물에 잠겨버린 파키스탄과, 관악구 반지하에 살던 세 식구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나눌 때, 언니가 우리의 끝을 생각해보게 된다고 했잖아. 지구상의 우리가 맞이할 완전한 끝에 관해 말이야. 그래서 아이를 낳는 일도 예전과는 다르게 고민스럽다고. 인생과 세상은 복잡다단하지만 그래도 아름답다고 믿었었기 때문에 또 다른 존재에게도 그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기회를 줄 수 있다면 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고.

 

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어. 슬픔과 고통의 이야기 뒤로 ‘그렇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같은 연결고리를 끼울 자리를 찾기가 어려워. 나의 다음 세대를 내 몸 안에서 기를 용기라면, 내가 언니보다 훨씬 모자라다는 걸 알지? 다음 세대의 슬픔은 고사하고 이미 세상에 태어난 슬픔, 존재하고 있는 슬픔 그걸 어쩌면 좋을지도 몰라하는 애잖아. 그래서 몇 군데의 후원을 십 년 넘도록 유지하는 애. 비극에 잠겨버린 도시의 광장으로 용감무쌍하게 나서서 희망의 깃발을 꽂지 않고, 변두리에 서 있다가 깃발을 휘두르며 걷는 사람의 뒷주머니에 만 원짜리 한 장을 꽂는 애. 그게 나잖아.

 

다른 이의 슬픔 곁에 그 슬픔을 향한 나의 슬픔을 세우는 일이, 언니는 어때? 난 보통 내 슬픔의 깊이가 얕다거나 폭이 좁다고 느껴져. 소중하지 않고 힘이 없는 슬픔 같아. 그런 궁색한 기분이 싫어서 슬프기도 싫어질 때면 이 시를 떠올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가마니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내가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에 관해 할 수 있는 일이 남았다는 걸 생각해. 빈곤한 슬픔, 허약한 슬픔, 그것들을 똘똘 뭉쳐 단단하고 힘센 슬픔, 어둠 속에서 평등하게 웃어주는 슬픔으로 만드는 일을. ‘나의 슬픔만 느끼고 있자니 옹색하고 너의 슬픔을 느껴보자니 무력해지는 게 우리의 슬픔일까?’ 언니가 물었을 때, 내가 언니를 봤을 때, 우리 사이엔 한 줄의 마음이 더 오갔던 것 같아.

 

지구상의 우리가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그때까지만 슬픔을 포기하지 말자. 우리 함께, 보리밭의 봄눈들을 데리고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자.’ (2022.10)



*<독서관>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인 <요일작가> 시즌2에서 무료 연재 하였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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