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자 노트
가령 어떤 내담자는 어떻게 가난이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을 수 있었을까." 그 끝에는 엄마가 1개를 맞아도 "잘했다"라고 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엄마는 자주 모질게 대했지만 가끔 오롯한 인정과 관심을 쏟아주었다. 그녀가 엄마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면서도 가난에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꺼내지지 않았던 복잡한 감정을 마주하고 풀어낸다는 건 단지 힘들었던 순간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그때-거기에 있었던 감정들을 남김없이 바라보도록 돕는 것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비로소 그때-거기의 온갖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내담자는 이제 희망을 본다. '상황' 때문에, '그래야만 해서', 살필 수 없었던 나의 목소리를 소리내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담자의 강점을 돌려주고 소감을 물으려던 참이었다. 정말 너무 대단해서, 그렇게 살아냈다니 고마워서, 지금도 용기내어 여기에 와있어서. 연민의 마음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내게 일어난 것은 당황스러움보다 '지금 이 감정을 참아야 하나'하는 고민이었다. 지금 내게 일어난 것이 상담자의 앞선 감정이었거나 미해결된 감정이었다면 분명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그 감정이 단지 나의 것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내담자와 함께하며 둘 사이에 일어난 무엇이었다. 내담자로부터 일으켜진 존경스러움과 감사를 억지로 참는 일은 모순이었고 자연스럽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과장되게 울거나 머물러있지는 않았으나, 다시 내담자와 눈을 마주하고 내게 무엇이 느껴졌는지 이야기할 수 있었다.
“제가 상담이 필요한가요?” 혹은 “그걸 굳이 다룰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아빠를 원망하고 있기보다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고 미래에 집중해야겠다."라는 식의 반응이었다. 상담자가 내담자를 존중하면서도 책임지는 반응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맞다, 아니다'로 판단하는 마음 내지는 설득하고 싶은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야지만이 내담자가 나도 모르게 반복하고 강화하고 있는 타인에 대한 기대를 상담자가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담자가 '옳은 답'을 내려는 압박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잠시 멈출 수 있다. 내담자와의 갈등과 균열이 두려워도 개방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알아차렸다면 그다음엔 어떤 반응이 필요할까? 그 순간 떠올린 상담자 반응의 선택지는 다음과 같았다: 상담의 일반론을 이야기해야하나(이것은 회피가 아닐까)? 혹은, 내담자에 대한 미니사례개념화를 전달해야하는가(이해받았다고 느끼고 다른 점이 있는지 물으며 협력적으로 만들어나가면서 동기화되지 않을까)? 아니면,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그것을 묻는 심정(궁금증 염려 저항)에 대해서 개방적으로 물어야 하나(만약 설명되지 않는 반복된 거부나 거절 행동이 있었다면 더더욱 고려해 봄직하다. 그 행동의 진짜 의미는 뭐였을까 호기심 어린 태도로)?
이 질문들은 너무 무거운 나머지 당시의 순간에서 빠져나와서도 떠나지 않았다. 어떤 반응이 최선이었을까. 앞으로 나는 무어라 할 수 있을까. 꽉 막힌 수챗구멍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구절은 다음과 같았다.
"상담자가 할 수 있는 중요한 개입은 내담자 자신이 대인관계 대처전략에 얼마나 엄청난 정서적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알게 하는 것이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대인관계 적응을 통해 개발한 힘과 능력을 알아주면서도 구체적으로 이 적응양식이 스트레스를 어떻게 만들어내며 현재 생활을 어떻게 제한하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이와 같은 비용/효과 분석을 한다. 이런 방식으로 내담자가 대처전략을 통해 개발해온 실제 강점을 인정해주는 동시에 그들이 치르는 대가를 공감적으로 살펴보도록 할 수 있다. 경직된 방어적 대처전략이 자아정체성의 기반이자 자기존중감의 일차적 자원이며, 해결하기 어려운 갈등에 대처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처음에 이 적응에 대해 탐색하기를 꺼린다. 일단 상담자가 이 방어체제가 내담자에게 제공해온 것을 충분히 파악하고 내담자가 스스로 그것이 성취한 것과 대가를 치른 것을 알게 해주면 상담자와 내담자는 내담자의 증상에 대해 덜 비판적인 태도로 더 참아낼 수 있게 된다."
<상담 및 심리치료 대인과정접근> ch. 7. 유연성이 적은 대인관계 대처전략 Pp. 315-317.
그렇다, 오랜시간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주었던 나의 일부분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는 것은 공격이나 비난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내담자가 현재 겪는 어려움, 그 어려움에서 내담자가 걸려 넘어지는 부분들, 그리고 지금은 걸려 넘어지지만 과거에는 내담자에게 안전함과 친밀감을 유지하게 해주었던 맥락을 빠르게 살피며 이해하는 상담자의 개입이 중요하다. 완벽한 이해란 없으나 가능한 구체적이고 공감적으로 이해하려고 질문하면서 소화해낸 만큼 비춰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담자가 언제 무거운 질문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상담자는 언제나 내담자를 궁금해하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채로 있어야겠다. 그래야지만이, 그 질문이 왔을 때 내담자에게 가능한 최선의 공감을 전달하고 내담자에게 탐색할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첫째, 내담자의 주호소를 듣는다. 오늘 무슨 이야기하고 싶은지, 어떻게 오게 됐는지부터 시작한다. 왜 하필 이 시점에 상담을 받기로 했을까. 만약 "2-3년 전부터 무기력했다"라고 한다면 어떨까? 물론 2-3년 전의 변화도 충분히 다뤄야겠지만, 지금 이 시점에 오게 한 변화를 먼저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그 지점이 내담자가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생생한 지점이므로. '회사가 힘들어졌다'라고 한다면, 그 역시도 구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 "뭐가 달랐길래 그렇게 좌절스럽고 힘들었을까요? 회사를 바꾼 것도, 새로운 일을 한 게 아니었는데, 뭐가 달랐길래 00님이 그때 그렇게 힘들어졌을까요?" 의무상담이나 검사를 위해 왔더라도, 왜 이 시점에 왔는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내담자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하다.
둘째, 상담에 대한 기대를 묻는다. 상담을 마쳤을 때 어떤 점이 어떻게 달라져 있으면 좋겠는지 묻는다. 내담자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고 싶은지, 지금은 어떻다고 느끼는지, 명료화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회기가 지날수록 정교화되고 (이상적으로는) 3-4회기 정도에는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셋째, 이전 상담이나 약물치료 경험이 있는지 탐색한다. 이전 상담/치료경험이 있었다면, 그때는 무엇으로 힘들었는지, 지금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무엇이 비슷하고 다른지 가늠해 본다. 그리고 상담 경험이나 상담자와의 관계는 어땠는지 묻는다.
넷째, 상담에 대해 궁금하거나 염려되는 점을 묻는다. 이후에라도 궁금함이나 어려운 점이 있다면 언제든 이야기할 수 있고 심지어 그것이 오히려 상담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상담에 대한 구조화와 교육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처음 용기 내어 이야기를 시작한 것을 진심으로 격려하고 환영한다. 낯설고 새로운 공간과 관계에서 이야기해보니 어땠는지 묻고 정리하며, 상담자가 추구하는 상담이 무엇인지 지향점을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