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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크림빵 Feb 27. 2024

언제나 좋은 질문이 필요하다

상담노트 12

  얼마 전 챗GPT를 사용해보면서 '좋은 질문을 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지겠구나' 싶었어요. 단순 업무는 사라질지라도 구체적이고 정확한 질문을 하고 다시 출력값에 기반해 질문을 수정해나가고 좁혀나가는 능력은 오히려 빛을 발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AI가 심리상담을 대체하는 시대는 아직 멀어 보입니다. 상담자의 역할은 좋은 답을 내려주는 일이 아니라 거꾸로 좋은 질문을 던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는 AI가 인간다움을 모방할 뿐 인간다움에 기반한 관계경험 자체를 줄 수 없다고 믿지만요.


  상담에서도 좋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상담에는 두가지 유형의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감정이 생생하게 묻어있는 상황을 구체화하는 질문입니다. '유기불안이 있다. 신혼집 위치를 정하면서 무시당한다고 느낀다. 사기와 회생을 밟느라 미래가 없다'라는 말을 듣고 구체적인 상황을 확인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멈추고 위안을 하기 시작하면 큰 진전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담자의 맥락이 구체적으로 펼쳐지지 않으면 우리는 제대로 반영하고 공감할 수 없고, 내담자도 그 상황에서 겪었던 감정을 느낄 수 없어요. 구체적으로 펼쳐보면, 상담자는 '아 정말 복잡한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구나'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고,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들었던 걸까요' 호기심 어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내담자는 그 상황에서 경험했던 감정을 다시 경험하고 언어로 말하면서 일부분 소화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런 점에서 감정이 생생하게 묻어있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묻는 질문은 언제나 기본이 됩니다.


  둘째,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나 생각을 펼치도록 탐색하는 질문입니다. 좋은 질문을 통해 내담자는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살펴보고 소화해냅니다. 단지 '짜증났어요, 스트레스 받았어요'와 같은 가면감정이나 복합감정에 머무르거나, '이런 감정이나 생각은 이기적이야, 미성숙한 거야'라는 식의 판단은 자신의 내적인 경험을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이고, 그럴 때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회피합니다. 또다시 그 혼란스러운 감정만을 느끼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내담자가 자신의 내적인 경험에 머무르고 그 경험을 수용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지금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하면서 어떤 감정이 느껴졌는지, 그 감정에는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는지, 어떤 연약한 마음이 있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이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졌다면, 충돌되는 감정과 생각에 숨어있는 매끄럽지 않은 연결들은 어떻게 이해해 볼 수 있을지도 질문합니다. '서운함이 정말 와닿네요, 그런데 왜 그게 죄책감까지 갈까요, 그 사이에는 뭐가 있는 걸까요? 언제 이런 감정을 또 느꼈을까요'와 같은 질문일 수 있어요. 숨어있는 생각이나 펼쳐지지 않았던 이전의 중요한 경험들이 연결되고, 그런 맥락 속에서 그 감정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내담자의 감정은 결코 비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비록 그 반응이 현재 상황에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더라도, 이전 경험의 맥락에서 이해해 보면 타당하거든요. 이런 과정을 이끄는 질문을 통해 내담자는 비로소 자신의 경험을 밀어내지 않고 수용할 수 있어요. 이런 내가 이상하거나 미성숙한 게 아니라, 그럴만했구나,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에 우리는 시원해지고 안전해집니다. 내담자는 상담자가 함께 버텨주는 환경에서 자신이 소화하지 못한 경험을 살펴보면서 하나의 통합된 이야기를 만들어나갑니다.


  저는 한때 소크라테스식 질문이 기계적이거나 공감적이지 않다고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상담을 하면 할수록, 섣부른 공감만큼이나 상담자의 해석이나 설명도 힘이 없다고 느낍니다. 해석이나 설명은 상담자가 급해지고 앞서나갈 때 일어나기 쉽거든요. 질문을 통해 내담자의 경험을 펼쳐내면 감정에 머무르게 되고, 질문을 통해 불편하고 버거운 감정의 맥락을 스스로 이해해나갈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지나며 그 감정은 더 이상 억제하거나 피해야 할 경험이 아니게 됩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주인공 빌리는 우여곡절 끝에 로열발레단 입학면접을 치르는데요. '발레에 관심 갖게 된 계기가 뭔지 설명해 볼래?' 첫 질문에 '모르겠다' 대답합니다. 다른 면접관이 다시 질문합니다. '춤출 때 어떤 느낌이 드니?' 빌리는 홀리듯이 그러나 분명하게 답합니다. '내 몸이 변하는 느낌이 들어요. 새처럼 날고 불타올라요.' 빌리의 생생한 경험이 펼쳐지고 우리는 그저 감동합니다. 내담자가 자신에게 꼭 맞는 대답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상담 및 심리치료 대인과정 접근> 8장 관계주제와 치유경험,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2462613621

지선씨네마인드2 <빌리 엘리어트> 편, https://www.youtube.com/watch?v=Hv2Cam-iG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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