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노트 13
대학병원 임상심리 레지던트 수련 기간 동안, 단기 심리치료를 하면서 주로 구조화된 인지행동치료를 했습니다. 석사 과정에서 받았던 대상관계에 기반한 수련 경험들은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병원의 요구도 있었지만, '병리적인 증상'을 다루기 위해서는 구조화되고 효과가 검증된 치료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그때를 떠올려보면 초심 상담자로서 자연스러운 불안과 미숙함을 견디기 힘들었구나 싶어요. 과학적 연구로 검증된 '근거기반치료'이므로 효과가 있다고 내담자 뿐만 아니라 상담자 자신을 설득하고 희망을 불어넣고 있었구나. 그러다보니, 구조화된 인지행동치료에는 '내용'만 남았고 '과정'은 없었습니다.
내용이란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다루고 무엇을 다르게 해볼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모델을 통해 우리가 문제를 이해할 것이고, 모델에 맞게 내담자를 어떻게 이해해 볼 수 있을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자동적 사고와 대안적 사고를 찾고, 역할연습과 가상노출을 통해 실생활에서 새로운 행동을 연습하는 식이죠. 여기에 내용은 있지만 치료자와 내담자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방식과 질은 빠져있습니다. 이렇게 내용에 초점을 맞춘 상담은 인지능력이 좋고 일상생활이 유지되고 있는 내담자에게는 빠르게 효과를 나타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치료과정이 더디거나 조기 종결에 이르렀어요.
그렇다면 초심 상담자인 저에게 문제가 있었던 걸까요, 수많은 논문으로 검증된 인지행동치료가 피상적인 치료접근이었던걸까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초심상담자인 제가 실천한 인지행동치료'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상담의 성과는 치료적 접근 간의 차이보다 숙련된 상담자인가 초심 상담자인가에 따라 차이가 있었던 걸 떠올려보면, 인지행동치료가 피상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초심 상담자로서 인지행동치료의 '내용'에만 초점을 맞추기 바빴기 때문에 치료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모든 상담 교과서는 상담의 성과가 '상담자와 내담자가 맺은 관계의 질'에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에 어떤 구체성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협력적이고 진솔한 관계란 뻔하고 당연한 말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러나 <상담 및 심리치료 대인과정 접근> 7판을 다시 읽으면서, 치료적인 관계란 단지 친절한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상담에서 다르게 반응하고 있는 나와 그 반응에 또다시 다르게 반응하는 내담자를 경험하면서, 협력적이고 진솔한 관계란 끈질기게 내담자를 위하는 태도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담자의 내적인 경험에 친절하게 초점을 맞추고, 그 초점을 유지하기 위해 의도를 가지고 노력하며, 상담자에게 일으켜지는 불안, 무기력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며, 오해와 균열도 기꺼이 개방적으로 다루려고 애쓰는,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상담자는 내용이 아니라 과정에도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단지 내용을 다루면 내담자는 지금-여기에서 새로운 관계 경험을 하기 어렵습니다. 상담자가 바로 지금-여기에서 일어나는 반복되는 상호작용을 인식하고, 그것을 무시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관여하며, 개방적으로 오해와 균열을 다룹니다. 그럼으로써 내담자가 스스로 수용할 수 없었던 감정과 경험을 마주할 수 있도록 상담자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 줍니다. 상담자와 내담자가 함께 내담자의 내적인 경험을 새롭게 이해하는 과정을 토대로 변화에 대한 희망을 품기 시작합니다.
병원 수련 당시에 만났던 내담자들을 떠올려보면, 감사와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낍니다. 불안을 다루고 미숙함을 인정할 수 있는 정서적 자원이나 깨달음이 있었더라면, 인지행동치료의 내용뿐만 아니라 과정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더라면, 상담의 성과는 명백히 더 좋았을 테니까요.
고백하자면 병원에서 수련받을 때 처음 <상담 및 심리치료 대인과정 접근> 6판을 읽었습니다. 많은 구절에 밑줄을 치면서 초심 상담자로서 이해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아직 경험도, 슈퍼비전도, 이해도 부족했기 때문이에요. 상담자의 불안과 무기력을 관찰하지도 치료적으로 활용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내담자에게 오롯이 초점을 맞출 수 없었어요. 이후로 <애착과 심리치료>, <정서와 작업하기>, <대상관계 심리치료 실제>와 같은 책들을 읽으며 이해를 넓히고, 슈퍼비전과 교육분석을 받고, 기업에 와서 정신과적 진단이나 인지행동치료에 갇히지 않고 맘껏 상담하면서, 이 책의 문장문장에 담긴 의미들이 구체적으로 이해되고 다르게 반응해 볼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여전히 상담은 자주 어렵고 종종 버겁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담이라는 미지의 영역이 무섭기만 하지 않습니다. 서퍼는 높고 험한 파도 앞에서 숱하게 무너지지만, 언젠가 그 파도를 제대로 탔을 때의 황홀함, 바람과 햇빛과 파도와 하나 되었을 때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으니까요. 끝없이 새로운 파도는 무한해서 두렵지만 무한해서 새로워지게 합니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말했듯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아져서 재밌습니다'.
"지금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그니까 알면 알수록 더 몰라요.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아져서 재밌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음악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정말 미궁의 세계에 빠지는 게 있어요. 어렸을 때는 그게 좋았거든요. 18-19살때는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발전할 수 있는 한계가 많구나라고 했는데. 점점 나이가 들수록 더 노력을 해야 하더라고요. 음악이 좋은 게 그런 거 같아요. 끝이 없고 계속하면 할수록 더 모르고 그러니까 재밌는 거죠." 김선욱 2022.05.13.
심리상담의 대인과정을 다루는 책들
<상담 및 심리치료 대인과정 접근 7판> Edward Teyber, Faith Holmes Teyber
<인지치료의 대인관계 과정> Jeremy D. Safran
<단기 역동적 심리치료 - 상담 실제를 위한 안내서> Hanna Levenson
상담 및 심리치료 대인과정 접근 7판과 함께 읽어볼만한 책들
<애착과 심리치료> David J. Wallin
<정서와 작업하기> Leslie S. Greenberg , Norka T. Malberg , Michael A. Tompkins
<대상관계 심리치료 실제 - 사례로 보는 치료 안내서> Allan G. Frankland
상담자 발달 단계에 대한 읽어볼만한 아티클
[상담자의 성장 단계], 월든지기, http://walden3.kr/5644
"내담자가 완전하게 치유되는 걸 경험한 상담자의 수가 너무 부족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수련 과정 내지는 초심 전문가 시기에 자신의 주력 분야 선정을 위해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 보는 것과 함께 가능한 한 회기 제한이 없는 세팅에서 일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조언하겠습니다"
"상담 목표가 무엇이 되었든 내담자에게 치유 경험이 나타나는 걸 상담자가 확인하면서 세밀하게 조율을 하려면 장기 상담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담자의 치유 극대화를 위해 다양한 치료적 기법을 경험하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니고 다양한 공부를 하면서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메우려고 미친듯이 노력하는 것이 2단계입니다. 2단계 중반이 되면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으면서 상담이 재미도 있고 보람도 느끼고 자신이 내담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상담이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