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게리맨더링: 선거구가 유권자를 선택한다

70%가 지지해도 의석은 0개, 수학이 민주주의를 농락하다

by 박상훈

40화. 게리맨더링: 선거구가 유권자를 선택한다

― 70%가 지지해도 의석은 0개, 수학이 민주주의를 농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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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텍사스주 오스틴.


소프트웨어 개발자 제니퍼 김(32세)은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며 한국 친구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여줬다. "미국은 민주주의 선진국 아니야? 왜 거기서도 정치가 이상해?"


제니퍼는 씁쓸하게 웃었다. 오스틴은 텍사스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다.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이 71%를 얻었고, 시민 10명 중 7명이 민주당을 지지한다. IT 기업과 대학이 몰린 이곳은 텍사스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며, 보수 텃밭 한가운데 떠 있는 '블루 아일랜드'다.


그런데 오스틴을 대표하는 연방 하원의원 5명이 모두 공화당이다.

70%가 민주당을 지지하는 도시에서 민주당 의원이 한 명도 없다.


비밀은 지도에 숨어 있다. 텍사스 주 의회는 2021년 선거구 재획정을 통해 오스틴을 5개 선거구로 쪼개고, 각 조각을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농촌 보수 지역과 이어 붙였다. 그 결과 5개 선거구 모두에서 오스틴 진보 유권자들은 40% 안팎의 소수파로 전락했다.


이것이 게리맨더링이다. 유권자가 정치인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정치인이 자신을 지지할 유권자를 골라 담는 것이다.


숫자가 말하는 잔혹한 현실


FEC 2022년 미국 중간선거 데이터:

- 전국 공화당 득표율: 50.6% / 민주당: 47.8% (2.8%포인트 차)

- 실제 의석: 공화당 222석(51%) / 민주당 213석(49%)


표로는 근소한 차이인데 의석으로는 9석 차이가 났다.

왜 그런지 주별로 들여다보면 왜곡이 극명해진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선거위원회 공식 결과:

- 2018년 연방 하원 득표율: 공화당 50.3% / 민주당 48.3%

- 실제 의석: 공화당 10석(77%) / 민주당 3석(23%)


50 대 48의 팽팽한 승부가 의석에서는 77 대 23으로 뒤틀렸다.

Brennan Center for Justice는 이를 "선거 결과를 사전에 설계한 대표적 사례"로 기록했다.


표를 훔치는 두 가지 마법: 패킹과 크래킹


패킹(Packing): 상대 당 지지자들을 한 선거구에 80~90%가 되도록 집중시킨다. 상대 당은 그 선거구에서 압도적으로 이기지만, 수많은 표가 과잉 승리로 낭비된다.


크래킹(Cracking): 상대 당이 강한 지역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 뒤, 각 조각에 자기 당 지지 지역을 붙여 중화시킨다. 오스틴이 바로 이 방식의 피해자다.


시카고대 로스쿨의 스테파노풀로스·맥기 연구는 이 기술의 수학적 효율성을 효율 격차(Efficiency Gap) 개념으로 정량화했다. 어떤 당이 상대보다 더 많은 표를 낭비하게 만드는지를 측정하는 지표다.


구체적 시뮬레이션:


1. 정상적인 선거구 (민주·공화 50:50인 주, 5개 선거구):

공화당 3석, 민주당 2석 (팽팽한 경쟁)


2. 게리맨더링 후 (패킹 1구 + 크래킹 4구):

공화당 4석, 민주당 1석


똑같은 50:50 민심이 80:20 의석으로 변하는 마법이다.


200년 된 기술의 현대적 진화


게리맨더링이라는 단어는 1812년 매사추세츠 주지사 엘브리지 게리(Elbridge Gerry)에서 나왔다. 그가 그린 선거구 모양이 도롱뇽(Salamander)을 닮았다고 해서 'Gerry-mander'가 됐다.


21세기 게리맨더링은 차원이 다르다.


데이비드 데일리는 저서 『RATF KED』에서 공화당의 REDMAP(Redistricting Majority Project) 2010년 프로젝트를 상세히 해부했다. 공화당은 인구조사 연도에 맞춰 주 의회를 전략적으로 장악하고, 이후 10년간의 선거구를 알고리즘으로 최적화했다. 투자액 3,000만 달러로 하원에서 20~25석의 추가 의석을 확보했다는 분석이다.


현대 게리맨더링 업체들은 인구조사 데이터, 과거 선거 결과, 유권자 등록 정보, 소비 패턴, 소셜미디어 데이터를 블록 단위로 결합해 수만 가지 선거구 조합을 시뮬레이션한다. 프린스턴 게리맨더링 프로젝트는 이를 외과 수술급 정밀도라고 표현한다.


대법원의 백기 선언: "우리는 손 뗐다"


대법원은 세 차례에 걸쳐 게리맨더링 문제와 씨름했다.


1986년 Davis v. Bandemer: 게리맨더링이 위헌이 될 수 있다고 인정했지만, 구체적 기준을 제시하지 못했다.

2018년 Gill v. Whitford: 위스콘신 공화당의 극단적 게리맨더링에 대해 원고 적격성을 문제삼아 본안 판단을 회피했다.

2019년 Rucho v. Common Cause, 588 U.S. 684: 5대 4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정당 게리맨더링은 연방 법원의 심사 대상이 아니다.
이는 정치 문제로, 법원이 아니라 정치 과정이 해결해야 한다."


Cook Political Report의 2024년 분석에 따르면 하원 435석 중 진짜 경쟁이 벌어지는 선거구는 43석뿐이다. 나머지 90%는 결과가 사전에 결정돼 있다.


2025~2026년: 재획정 군비경쟁의 시대


Rucho 판결의 후폭풍은 트럼프 2기에서 더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부터 텍사스·오하이오 등 공화당 주들에 인구조사 주기를 기다리지 않는 중간 재획정을 압박하고 있다. 이에 맞서 캘리포니아 뉴섬 주지사도 독립 획정위 제도를 재검토하겠다고 경고하며 재획정 군비경쟁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극단주의를 배양하는 온실 효과


게리맨더링의 진짜 비극은 의석수 조작을 넘어선다.

안전 선거구 의원들이 경합 선거구 의원보다 당내 경선에서 더 극단적인 공약을 내세울 확률이 34%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본선에서 질 걱정이 없는 의원은 당내 강경파만 의식한다.

타협은 곧 정치적 자살이 되고, 99%의 국민이 겪는 의료비·학자금·주거 문제는 뒷전이 된다.


한국은 다른가: 독립 획정위의 방어막


한국은 국회의원선거구획정위원회라는 독립 기구가 공직선거법에 따라 인구 비례와 행정 구역을 기준으로 선거구를 획정한다. 미국식 알고리즘 기반 극단적 게리맨더링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2020년 21대 총선에서 불거진 위성정당 사태는 거대 양당이 규칙의 빈틈을 파고들어 기득권을 영구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줬다.


법이 아닌 정치적 의지가 민주주의의 마지막 방어선이라는 것을 한국도 목도했다.


오늘의 교훈


지도 위에 그어진 선 몇 개가 민주주의의 운명을 바꾼다.

정치가 고장난 게 아니다. 소수 기득권에게 너무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41화 예고: 투표하기 어렵게 만드는 나라

가장 쉽게 선거를 이기는 방법은 상대편이 투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41화에서 계속됩니다.


[세계 구조를 읽어보자 - 미국편]

정치 시스템의 구조적 교착

5화 (시리즈 40화). 게리맨더링: 선거구가 유권자를 선택한다

(이 글은 FEC 2022년 중간선거 하원 득표·의석 데이터, 노스캐롤라이나 주 선거위원회 2018년 연방 하원 공식 결과, Brennan Center for Justice 게리맨더링 해부 보고서, Travis County 2020년 대선 결과, 텍사스 주 의회 2021년 SB 4 재획정 법안, Republican State Leadership Committee REDMAP 2010 프로젝트 보고서, Rucho v. Common Cause 588 U.S. 684 연방대법원 판결문 2019, Davis v. Bandemer 478 U.S. 109 판결문 1986, Gill v. Whitford 585 U.S. 48 판결문 2018, Cook Political Report 2024 경쟁 선거구 43석 분석, Princeton Gerrymandering Project 분석 도구, Nicholas Stephanopoulos & Eric McGhee "Partisan Gerrymandering and the Efficiency Gap" University of Chicago Law Review Vol.82 2015, David Daley "Ratf ked" Liveright 2016, ProPublica 게리맨더링 해설, AP 트럼프 2기 중간 재획정 압박 보도, The Atlantic 재획정 군비경쟁 분석, 공직선거법 제24조 국회의원선거구획정위원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제21대 총선 위성정당 관련 법적 쟁점 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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