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책 띠에 적힌 카피다. 외계어 같은 한글 책 제목보다는 이 카피가 더욱 마음에 든다.
Sonny님의 추천으로 구입하고 책을 받은 건 금요일. 토요일 밤 읽기 시작해서, 일요일 등산 다녀오고 저녁에 나머지 부분을 읽고 이틀만에 완독했다.
처음엔 달리기의 기술이나 역사, 과학적 설명을 다룬 책인줄 알았다. 물론 이런 부분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을 다 읽고 가슴에 남는 것은 '생의 의미'다. 띠지에 적힌 또 하나의 카피, '인간은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 두근두근 가슴을 뛰게 만든다.
책의 구성방식은, 마치 라라무리족의 트레일러닝 코스와도 참으로 닮았다:) 큰 줄거리는 있지만 중간중간 느닷없이 강물도 나타나고, 협곡도 나오고, 때로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는 그런 진행방식이다. 하지만 기자답게 '사실'에 대한 보고도 잊지 않아서 책 한권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상당히 많다. 음, 적고 보니 정말 굉장한 책이네. 정보와 감동을 동시에 줄 수 있다니 말이다 ㅋ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라면, 울트라러닝, 트레일러닝, 인간이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는 과학적 증거(네안데르탈린 vs 호모사피엔스), 나이키 등 고기능운동화의 불편한 진실, 타라우마라(라라무리)족에 관한 짧은 역사, 달리는 방법 등. 하지만 이 모든 간단한 정보만을 위해 이 책을 택했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많이 부족한 책이 될테다. 사진 한 장, 꼼꼼한 설명 하나 없으니까.
예를 들어, 달리는 좋은 자세가 뭘까... 궁금해서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책에서 당신에게 말해주는 사실은
발 앞쪽으로 서서 뒤쪽을 세우고, 허리를 세우고, 머리는 움직이 않고 팔은 높이 들고, 팔꿈치는 휘두르고, 발은 재빨리 앞쪽을 딛고, 엉덩이를 향해 뒤로 찬다. 뒤꿈치는 스치듯이.
이것이 전부다 ㅋㅋ
이 책은 이런 기술서를 찾는 사람들보다는 달리기를 좋아하고, 달리기의 기쁨을 함께 공유하고, 두근대는 마음과 열정을 함께 느끼며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더 재미있는 책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나 역시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여러가지 다양한 정보가 아니라 365쪽에서 366쪽에 나온 카바요 블랑코의 경기 전 마지막 연설(?)이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눈물이 났다. 발췌를 할 수도 있지만, 의미가 없다고 봐서 발췌는 하지 않았다. 카바요는, 바로 달리기의 의미, 진정한 스포츠의 의미(스포츠 마케팅이 훼손하지 않는), 그리고 더 나아가 인생의 의미를, 죽기 직전까지 두근대는 심장의 의미를 말했으리라.
그래도 책 내용에서 몇 가지 인상적인 것을 생각나는대로 나열해 본다면,
1. 발은 충격을 좋아한다(가장 좋은 신발은 맨발).
신발은 충격이 아니라 고통을 막는다.
고통은 편안하게 달리는 법을 가르친다.
맨발로 달리는 순간부터 달리는 방법이 달라질 것이다. -맨발의 선언문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허리에 더 좋지 않다는 건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신발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몸에서 느끼는 통증은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경고 시스템이다. 그런데 운동화는 통증을 없애려고 하는 방향으로 개발되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책 곳곳에서 계속 나온다.
신발이 낡고 쿠션이 얇아질수록 주자들이 발을 더 잘 통제할 수 있어 헌 신발이 더 안전하다. 신발은 푹신할수록 발을 보호하지 못한다.
발 한가운데는 아치다. 아치는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무게를 잘 견딜 수 있는 설계다. 아치가 아름다운 것은 압력을 받을 때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세게 누를 수록 각 부분이 더 단단하게 맞물린다.
"발을 신발 속에 넣는 것은 깁스를 하는 것과 같다"
신발을 신으면 힘줄이 딱딱해지고 근육이 오그라든다. 발은 압력을 받으면 강해지도록 만들어졌다.
앨런 웹의 발견처럼, 할 일이 없게 만들면 무너진다. 하지만 제 일을 하게 만들면 무지개처럼 아치를 그린다.
폴 브랜드 박사는 신발을 벗어버리면 한 세대 안에 발에 관한 모든 질병을 깨끗이 없앨 수 있다고 주장. 1976년에 이미 그는 맨발로 다니는 나라에서는 진료실에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사례의 발 질환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맨발로 걷는 사람은 바닥에 대한 정보와 바닥과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계속 받는다. 반면 신발을 신은 발은 변화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잠잔다."
그래서 이런 과학자들의 주장과 논문, 맨발로 달리는 운동선수들의 증언, 맨발로 달리는 케냐 마리토너에 대한 연구를 통해 개발된 운동화가 바로 '나이키 프리'란다. 슬로건은 "맨발로 달려라!"
2. 인간은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
이 챕터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과 가설들이 가득해서(신체와 근육구조, 땀, 폐활량, 네안데르탈린의 멸종과 호모사피엔스의 진화 등등) 전부다 소개하고 싶지만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실은 아래다. 책에서는 미국 유타대학교 생물학과 교수인 데니스 브램블을 통해 질문을 하나 던진다.
"우리는 2004년 뉴욕 마라톤 결과를 모니터링하고 연령별로 완주시간을 비교했습니다. 주자들은 19세부터 매년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해서 27세에 정점에 이른 후 쇠퇴하기 시작하죠. 그렇다면 다시 19세 때와 같은 속도로 달리게 되는 나이는 몇 살일까요?"
책의 저자도 독자인 나도 대충 찍어봤지만 정답은 정말 놀라웠다.
"64세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64세 노인이 19세 젊은이와 겨룰 수 있는 스포츠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에게는 정말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장거리 달리기를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놀랍도록 오래 달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달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입니다. 그리고 이 기계는 절대로 닳지 않아요."
늙어서 달리기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 딥시의 악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달리기를 그만두기 때문에 늙는 것이다.
"여성의 연구결과도 남성과 같습니다."
"여성은 지금까지 지나치게 저평가되었습니다.(중략). 사실 여성이 남성과 나란히 사냥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여성이야말로 정말 고기가 필요한 장본인이었으니까요. 인간은 유년기와 임신, 수유기간에 가장 고기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고기를 얻을 수 있는 곳에 되도록 가까이 있지 않을 이유가 있었을까요? 사냥꾼이자 채집자인 유목민은 짐승 떼의 이동에 따라 캠프를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식량을 캠프로 가져오기보다는 캠프 전체가 식량을 따라가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콩고의 므부티 피그미족은 사냥 중에 아기를 낳고 그날 아침에 다시 사냥에 참가했다" 그들과 여러해를 보낸 인류학자 콜린 턴불은 말했다. "어머니들이 사냥에 참가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인간에게 무엇이 있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함께 모여서 미친듯이 달리는 것 외에 아무런 수단이 없었다. 인간은 모든 영장류에서 가장 협동적인 존재였으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 송곳니로 무장한 세상에서 인간의 유일한 방어수단은 결속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달리지 않을까? 이에 대한 대답 또한 책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유기체들과 달리 인간은 몸과 머리가 같은 목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몸은 수행하도록 만들어졌지만 뇌는 항상 효율성을 추구합니다."
"뇌는 언제나 비용을 줄이려고 합니다. 적은 것을 내고 많은 것을 얻고 싶어하고, 에너지를 저장하여 응급상황에 대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의 몸에는 환상적인 달리는 기계가 있지만, 이 기계를 조종하는 뇌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이 녀석을 달리게 할 수 있을까?'"
인간의 환상적인 달리기는 뇌가 자라는 데 필요한 식량을 주었지만, 지금은 그 뇌가 달리기를 방해한다.
"필요도 없는데 엔진을 켤 이유가 무엇인가?"
뇌는 과거 99%의 역사에서 제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과거에 앉아서 쉬는 것은 사치스러운 행위였다. 그래서 앉아 쉬고 기운을 회복할 기회가 생기면 언제나 놓치지 말아야 했다. 인간이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빈둥거리는 삶을 살게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산업혁명 이후, 19세기 이후겠지요. 그 결과 지구온난화... orz).
최초의 우주선을 발사하기 전 나사의 과학자들은, 중력을 제거하면 끊임없이 내리누르는 중력에 저항하는데 사용되던 에너지가 대신 젊음의 샘물을 마신 것처럼 뇌와 몸으로 가지 않을까.. 하고 가설을 세웠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주비행사들은 며칠 만에 갑자기 늙어버렸다. 뼈는 약해지고 근육은 위축되고 불면증, 우울증, 극도의 피로감, 나른함에 시달렸고 심지어 미뢰도 퇴화했다.
주말내내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고난 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중력 제로 상태를 인공적으로 경험한 셈이다.
우리는 몸이 해야할 일을 빼앗았고, 이제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서구 십대 사망원인인 심장병, 중풍, 당뇨병, 우울증, 고혈압, 각종 암들은 조상들에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의 탄환이 하나 있다.
"간단합니다. 그냥 다리를 움직이는 겁니다. 자신이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역사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3. 아르눌포 키마레와 스콧 주렉
루이스가 앞서 달려가서 셔터를 눌렀다. 지난 2년동안 내가 달리기에 대해 알게 된 모든 것은 그의 카메라 안에 담겨 있다. 루이스가 찍은 것은 아르눌포와 스콧의 닮은 꼴 폼이 아니라 닮은 꼴 웃음이었다. 두 사람은 파도 속에서 유영하는 돌고래처럼 순수하고 벅찬 기쁨에 웃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이것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이 묘사를 읽는데 저도 저 사진이 어떤 건지 궁금해져서 혹시나 하고 검색해봤습니다.
다행히 있더군요.
정말 아름다운 사진이더라고요(사진 보니까 저도 아르눌포씨처럼 나풀나풀 블라우스 입고 뛰고 싶네요. 당신은 정녕 패셔니스트 스포츠맨:D
20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