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좋아하는 음식 중에 묵은지 김치찌개가 있다. 장기간 숙성된 묵은지의 맛은 오묘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오래도록 반복된 시간의 무게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비슷한 청중을 대상으로 하는 발표의 경우, 횟수가 거듭될수록 숙성보다는 매너리즘에 빠지기 십상이다. "김 과장, 이번에는 좀 참신하게 발표해봐. 내용이 너무 진부하잖아."라는 직장 상사의 코멘트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기라도 한다면, 잠 못 드는 밤은 이미 예약 완료다.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말겠다'라는 강박은 김 과장의 영혼을 사정없이 흔들어 댄다. PPT 최신 템플릿도 찾아보고, 글꼴과 색상에 변화를 준다. 멋진 오프닝과 클로징 멘트도 준비해 본다. 머리 자른 지 얼마 안 되었으면서, 괜히 헤어스타일도 바꿔 본다. 하지만 결과물(발표 자료)은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재탕, 삼탕의 길을 가게 된다.
복잡하고, 어렵고, 힘든 일이 주어졌을 때 어디론가 숨고 싶고 압박감에서 벗어나고픈 것이 사람의 본능이다.
일의 핵심을 건드리는 대신에, 허접하고 하기 쉬운 것만 해 놓고 '그래도 할 만큼 했어.'라는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준다. 최선을 다한 정면돌파보다는 손쉬운 도망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게으름(귀차니즘)이야말로 새로운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새로운 발표를 하고 싶지만, 게으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김 과장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딱 두 가지만 생각해 보자.
첫째는, 처음 발표 무대에 올랐을 때의 열정적 마음가짐을 되살려 보는 것이다. 영혼까지 갈아 넣어서 자료를 만들고, 죽어라 연습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발표하던 그때의 설렘 말이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열정을 되살려야 하는 이유는, 게으름을 극복하는 데 이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청중을 충분히 파악하여 요구 사항을 반영하는 것이다. 같은 환경에서 하는 발표라 하더라도, 청중이 똑같지는 않다. 그들의 니즈와 애로사항은 늘 달라지기 때문에 청중의 변화를 발표 자료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 청중을 알면 알수록 발표 내용은 점점 더 좋아지기 마련이다. 청중에 집중할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