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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Apr 02. 2024

감독으로부터 시작된 물음, 댓글부대는 절대악이 아닐까?

[넘버링 무비 24] 영화 <댓글부대>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영화 <댓글부대>는 주인공인 임상진(손석구 분) 기자의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된다. 그의 말을 빌어 작품의 시작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모종의 세력과 댓글로 인해 여론이 조작된 사건이 비단 최근의 일이 아니라는 것. 90년대 PC 통신이 활발했던 시절, 당시에 활동했던 ‘앙마’라는 인물과 그의 커뮤니티 ‘산 넘고 물 건너’가 그 근거로 제시된다. 일종의 지나온 역사와 흐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물은 2017년의 탄핵 촛불운동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극 중 사건과 소재가 실재했던 것인가 하는 물음은 중요하지 않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기자의 말과 달리, 이 영화 자체는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그 마저도 일부 각색되었다. 안국진 감독 역시 관객이 몰입하도록 만드는 것과 영화가 끝나고 난 후에 현실과 극 사이에서 혼동에 휩싸이면 좋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굳이 따지자면, 페이크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것이며, 대체로 이 장르에서 완성되는 현실은 현실과 가까울 뿐 완벽하게 고증되거나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완벽한 진실보다 거짓이 섞인 진실이 더 진짜 같다.”


이 글에서도 영화가 현실을 얼마나 많은 부분 따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이 이야기를 다시 만드는 과정에서 ‘댓글부대’라는 존재를 절대악으로 다루고 싶지 않았다’는 감독의 말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그려지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의 슬로건처럼도 여겨지는 완벽한 진실보다 거짓이 섞인 진실이 더 진짜 같다는 말처럼 진실과 허구가 혼재하고 있는 이야기 속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02.

기자가 되면 세상이 얼마나 놀라운 일들로 가득한지 알게 된다던 기자 상진의 삶은 대기업 ‘만진’의 비리를 폭로하겠다는 제보와 함께 전복되고 만다. 대기업의 횡포로 인해 기술 유출은 물론 국가사업마저 놓치게 된 국내 중소기업 대표의 증언과 나름대로의 증거가 거짓으로 둔갑하면서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세상에 내보낸 특종 단독 기사가 오보로 판명되고 갑자기 터진 연예인 마약 기사로 덮이면서 그는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된다. 제보자의 자살과 이름 모를 출처의 온갖 비난, 정직은 덤이다.


그런 그에게 한 남자가 접근해 온다. 상진이 경험한 일련의 일이 만전의 비리를 숨기기 위한 공작이라며 증거도 모두 갖고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다. 온라인 여론 조작 팀인 ‘팀알렙’의 ‘찻탓캇’(김동휘 분)이다. 그는 자신의 팀이 여론 조작을 해 온 과정과 수법을 세상에 알리는 기사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애초에 조춘구 교수라는 전혀 다른 인물의 온라인 계정으로 접근해 왔으니 완전히 믿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다. ‘팹택’(홍경 분)과 ‘찡뻤킹’(김성철 분)이 포함된 팀알렙과 상진의 만남, 댓글부대에 대한 취재는 그렇게 시작된다.


여기까지는 이 이야기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바탕을 마련한 것에 불과하다. 감독이 말했던 사실과 거짓이 혼재된 이야기를 그리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쌓아나갈 서사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 마련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댓글부대’라는 집단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줄 근거에 해당하는 몇 가지 예시와 그로 인해 초반부에서 망가져버린 상진이 후반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 사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곁가지에 불과하다.


03.

“완전한 진실은 아니지만, 완전한 거짓도 아니다.”


영화의 시작에 등장하는 시대의 흐름과 관련된 예시를 제외하면 ‘댓글부대’를 설명하는 과정에 놓이는 예시는 두 가지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영화 홍보와 관련된 작업. 흥행에 실패할 영화를 홍보해 달라는 제작사 대표(김희원 분)의 의뢰를 받은 세 사람은 멀쩡하게 흥행 중인 다른 영화에 흠집을 내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스코어를 독점하는 영화 하나를 무너뜨리고 나면 그 틈을 파고들 여력이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긍정적이고 전통적인 의미의 홍보는 분명 아니다.


다음은 이은채(오예주 분)라는 대학생과 관련된 사건이다. 팀알렙이 의뢰받은 것은 그녀의 아버지인 이용찬의 1인 시위를 막으라는 것이지만, 그가 인터넷을 전혀 이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딸을 이용하는 계획을 세운다. 방식은 간단하다. 가상의 온라인 계정을 수도 없이 만들어 은채의 SNS를 찬양하는 댓글로 도배하고, 커뮤니티에도 퍼뜨리며 대중의 반감이 생기도록 유도한다. 그 결과 아버지의 시위를 멈추는 의도된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아무런 잘못이 없는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과도 초래하게 된다.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겠다. 영화에서도 표현되고 있듯이 이들의 행동은 실수나 잘못이 아닌 미필적 고의에 가깝다.


앞서 언급한 듯이 이 두 가지 사례는 영화가 ‘댓글부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예시로 제시되지만 부여받은 역할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이들 ‘댓글부대’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며, 이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초래할 수 있는지 추론할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하나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또 하나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한 지점에 국한되지 않고 전방위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처음에 설명한 감독의 말, ‘댓글부대라는 존재를 절대악으로 그리고 싶지 않다는 말’은 이미 여기에서부터 의문이 생기고 만다. 절대악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의, 최소한의 선이라는 게 이들 집단으로부터 발현되거나 내부에 존재해야 하는데 과연 정말로 그런 부분이 이 영화에서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04.

영화의 중후반부를 지나며 팀알렙 멤버들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이 제시되기는 한다. 자신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단순히 돈을 버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작업이 훨씬 더 거대한 개념의 움직임을 보이면서부터다. 찻탓캇이 상진에게 접근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취재하고 세상에 고발해 달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을 두고 이들 집단이 절대악은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라면 비단 가졌어야 할 마음을 조금 꺼내드는 것으로 그런 부분을 충분히 표현했다고 말하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 집단을 절대악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후반부에 놓이는 상황, 상진이 경험하게 되는 사건과도 분명 충돌하게 된다. 추가 취재와 후속 기사를 통해 재기를 노리는 기자 상진이 댓글부대의 진실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이다. 영화는 이 부분을 극적 클라이맥스이자 반전 장치로 활용하며 다시 한번 특종 기사를 완성해 1면을 장식하는 그의 위치를 바닥으로 추락시킨다. 이를 통해 상진과 관객은 기사가 나간 뒤에야 그 역시 작업의 대상이었음을, 인터넷의 찌라시 자체를 없앨 수는 없으니 그를 이용해 신뢰도를 떨어뜨린 것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은 극 중에 정확한 악의 세력이 놓이지 않고는 불가능한 세팅이다. 영화의 중반부에서부터 후반부까지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댓글부대’의 악행에서는 조금도 인간적이거나 선한 태도를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의 행위를 통해 사회에 발현되는 결과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감독의 말대로 절대악이 아닌 대상으로 표현되고자 했다면 어떤 행동 수정의 과정이 놓이거나 적어도 상진을 찾아온 찻탓캇의 의도는 선의에만 머물렀어야 했다. 후반부에서 표현되는 댓글부대의 주체가 팀알렙보다 더 큰 개념의 집단이기는 하지만,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설정인 듯 보인다.


결국 둘 중 하나다. 마지막 지점의 반전 요소를 극대화하기 위해 처음의 설정을 스스로 소비하는 선택을 한 것이거나, 절대악이 아닌 것으로 그리고 싶었던 마음과 달리 감독이 바라본 현실의 모습이 더욱 어둡고 우울했거나.


05.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영화의 균형감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가 가진 빠른 속도감은 감독의 의도대로 관객이 단 한순간도 눈을 뗼 수 없을 정도로 몰아붙이는 힘이 있고, 그렇게 빼앗긴 시선은 잠시나마 이 이야기가 현실의 것인가 하는 약간의 혼란도 느끼게 만든다. 어쩌면 극 중 대사 가운데 하나인 ‘완벽한 진실보다 가짜가 섞인 진실이 더 진짜 같다’는 말의 체험을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감독 인터뷰의 짧은 문구 하나로부터 시작된 이 글의 내용이 어쩌면 조금 트집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는 작은 유격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하고, 서로 마주하지 않는 사소한 의미로부터 만들어지기도 한다. 스스로의 궁금증에서 시작된 것으로 그를 ‘작업’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음을 정확히 밝힌다. 이번에는 조금 오래 걸렸지만, 앞으로도 안국진 감독의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애정 어린 관심으로 그가 걸어가는 길을 지켜볼 것이다.



이 글은 24.04.02.에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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