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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Apr 07. 2024

아들을 잃은 엄마의 슬픔, 그리고 광기

[넘버링 무비 24] 영화 <마더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감독과 배우의 이름만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정보에 앞서 관객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요소가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영화 <마더스>의 면면은 화려한 편에 속한다. 일단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주연 배우가 앤 헤서웨이와 제시카 차스테인이다. 앤 헤서웨이는 <레 미제라블>(2012)의 팡틴 역을 맡아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제시카 차스테인은 <제로 다크 서티>(2013), <인터스텔라>(2014) 등의 작품에 꾸준히 출연하며 연이어 호평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제 오스카급으로 평가받는 두 배우를 하나의 작품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선이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상대적으로 브누아 들롬 감독의 이름은 다소 생소할 수도 있다. 이 작품이 그의 첫 연출작이라서다. 영화 작업이 처음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미 수많은 작품에서 자신의 발자취를 남겨왔다. 감독이 아닌 촬영감독의 자리에서다.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작품들이 많다. 마크 허만 감독의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2008), 앤 헤서웨이 주연의 <원 데이>(2011), 안톤 코르빈 감독의 <모스트 원티드 맨>(2014), 제임스 마쉬 감독의 <사랑에 대한 모든 것>(2014) 등이 모두 그가 촬영한 작품이다. 그는 스타일리시하면서도 인물의 감정을 정확하게 포착한다는 평가와 함께 세계적인 인정을 받은 촬영감독 중 하나다.


이들이 함께 모여 작업한 영화 <마더스>는 소설가 바바라 아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2018년도의 벨기에 스릴러 영화 <듀엘스>(Duelles)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1960년대의 뉴저지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이야기는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던 두 이웃 사이에 벌어지는 사고와 변화를 담고 있다.


02.

두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최대한으로 담는 신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셀린(앤 해서웨이 분)의 생일을 위해 앨리스(제시카 차스테인 분)의 가족 모두가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하는 장면이 그 중심에 있다. 관상목으로 만든 경계를 두고 나란히 마주한 두 집이 마치 한 가족처럼 서로를 위하는 모습이다. 그런 환경의 영향을 받은 셀린의 아들 맥스와 앨리스의 아들 테오 역시 같은 학교를 다니며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친구 사이가 된다.


아들 테오의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앨리스의 모습만이 이 화목한 장면의 유일한 흠이다. 아직 8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이 조금만 대답을 늦게 하거나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으면 예상되는 수준을 넘어서는 반응을 보이며 테오를 찾아 나선다. 그런 모습조차도 상냥한 이웃인 셀린의 도움으로 아직까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 장면들 속에서 굳이 하나의 흠을 더 찾아내자면 전직 간호사였던 셀린이 지금의 삶에 만족하는 것과 달리 전직 기자였던 앨리스는 복직을 원한다는 것 정도랄까? 이 또한 두 사람의 성향에 차이가 있다는 것 정도만 알려줄 뿐이지 큰 갈등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


이야기가 시작부터 두 가정의 화목함을 강조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극 중의 화목한 관계에는 반목과 불화가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 영화에서는 셀린의 아들 맥스가 2층 테라스 난간 위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가 도화선이 된다. 집안 청소를 하느라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셀린 대신 때마침 정원에서 일하고 잇던 앨리스가 그 위험한 모습을 발견하고 내려오라고 몇 번이나 설득을 해보지만 소용이 없었던 상황. 급히 그의 집으로 향해보지만 상황은 이미 벌어진 이후다.



03.

여기까지만 보면 영화에는 하나의 불행한 사고만 놓여있을 뿐, 그로 인해 문제가 될만한 사실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일차적으로는 아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엄마 셀린에게 가장 큰 문제가 있다. 앨리스의 행동에는 선의로부터 시작된 도의적인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두 사람, 두 가정 사이에는 불편하고도 미묘한 경계가 생긴다. 아들을 잃은 셀린은 앨리스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고 반대로 앨리스는 집 안에 머물고 있는 셀린이 자신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니, 셀린의 눈빛으로부터 자신을 원망하는 감정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에게는 거리를 두면서 자신의 아들과는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이제 앨리스는 궁금하다. 셀린이 갖고 있는 감정은 무엇일까?


만약 이 지점에서 셀린이라는 인물의 감정과 태도가 일관된 경향을 보인다면 영화는 지금보다 훨씬 단조로운 형태를 갖게 될 것이다. 인물이 변화하지 않으면 극의 흐름도 바뀌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변한다. 아들 맥스의 장례식이 끝난 뒤에 집을 잠시 떠나는 셀린은 한 달 뒤 다시 돌아와 앨리스와 거리를 두려 했던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영화의 스토리라인 전체가 전형적이기는 하나 단조롭지 않은 이유다. 문제는 그녀가 보이는 실제 행동이다. 이때부터 앨리스는 셀린과 연관된 일들로부터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행동, 슬픈 모성애의 모습이라고 치부하기엔 무서운 일들이다.


04.

관계와 심리의 표현이 다소 복잡한 관계로 영화의 전반부에 대한 설명을 길게 나열했다. 사실 이 영화의 핵심은 셀린의 모성애와 앨리스의 불안증의 충돌에 있다. 모성애이기는 하나 아들을 잃은 후 잘못된 방식으로 흐르는 자신의 심리를 내버려 둔 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진행해 나가는 셀린의 모습. 그리고 근거가 있는 의심을 하고 있지만 과거 불안증을 겪은 병력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고립되고 마는 앨리스의 상황. 이 두 가지가 영화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로 부딪힌다. 중요한 것은 이를 표현해 내기 위한 영화의 내러티브가 꽤 밀도 있게 조직되어 있다는 점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도 극의 중심에 서 있는 두 인물의 심리와 갈등이 교묘한 위치에서 잘 표현될 수 있는 이유다.


아이들이 만든 조경목 아래의 터널과 관련된 문제, 맥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 셀린이 테오를 만나 벌이는 몇 번의 교묘한 수법, 맥스의 할머니를 살해하는 등의 사건들은 두 사람의 그런 갈등을 점진적으로 증폭시키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여러 정황을 셀린의 쪽에 유리하도록 설정하고, 자연스럽게 앨리스의 행동과 생각이 과민하다는 방향으로 몰아간다. 무너지기 시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균형은 셀린에게 앨리스의 공간을 침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 존재하는 결말이 완성될 수 있도록 만든다.


05.

사실 처음부터 두 인물은 비틀린 축을 중심으로 한 대칭의 자리에 서 있다.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전히 반대의 설정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복직을 원하지 않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셀린과 달리 복직을 원하는 앨리스. 둘째 아이를 가질 수 있지만 원하지 않는 앨리스와 애초에 가질 수 없는 셀린. 그리고 맥스의 죽음 이후에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셀린과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사고로 인해 부모를 잃는 큰 슬픔을 겪어야 했던 앨리스의 처지가 그렇다. 영화 속에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잠깐 언급되고 지나가는 부분들이지만 이렇게 쌓인 차이들은 두 사람이 보이는 태도와 행동을 이해하는 근거가 된다.


두 사람 곁에 머무는 또 다른 두 인물, 각각의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이 두 사람 역시 1960년대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남편의 표상을 하고 있어 처음에는 비슷해 보인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의 아내를 대하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셀린의 남편과 달리 앨리스의 남편은 이미 아내의 감정적 붕괴를 경험하고 대처해 온 인물이다. (아내의 불안증과 관련한 내용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아내의 손을 놓지 않았고, 영화의 중후반부를 지나며 다시 한번 그녀의 과민함을 의심하면서도 끝내 지켜내고자 한다. 하지만 셀린의 남편은 다르다. 그는 이해보다 원망에 조금 더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 두 사람의 마지막 날에도 자신의 자식은 잘도 빨리 잊었다며 윽박지른다. 사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내내 앨리스 부부를 가까운 곳에, 셀린 부부를 먼 곳에 두고 있다.



06.

이 영화에서는 공간을 이해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제한된다. 80% 이상이 두 가정의 공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프레임에서 모습을 감추는 것도 그들의 남편과 같은 바깥의 인물이지, 가정을 떠날 이유가 없는 두 인물 셀린과 앨리스는 언제나 이곳에 남는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두 사람이 결혼과 출산으로 각각 간호사와 기자 일을 그만두었다고 언급되는 장면이 있다. 다만 이 좁은 공간에서도 의미 있는 인물의 이동을 발견할 수 있는데, 셀린의 움직임이다.


셀린은 아들의 죽음 이후 다시 집으로 돌아와 몇 차례나 앨리스의 아들인 테오를 자신의 집으로 끌어들인다. 처음에는 잃어버린 아들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한 행동으로 여겨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행동에는 노골적인 의도가 담기기 시작한다. 앨리스 역시 이를 의심하지만 쉽게 드러낼 수는 없는 상황들이 계속 이어진다. 자신의 병적인 면 역시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쉽게 달성하지 못한 셀린은 이제 자신이 앨리스의 공간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테오가 아들의 사고가 있었던 테라스 난간에 올라간 사건이 기점이다. 앨리스 가족의 의심이 시작되고 있음을 직접 느끼게 되고, 더 이상 테오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의 그들의 공간으로 이동한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화를 본 관객들이 지금 떠올리는 결말과 같다. 이 공간의 전환을 생각하면 테오와 자신이 서로 이해하고 있다던 셀린의 말이 얼마나 기괴하고 무서운 종류의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07.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내용이 정확한 자리에서 적정한 긴장감을 유지해 낸다는 것이 이 작품이 가진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일평생 프레임 위에 이야기를 담는 일을 이어온 브누아 들롬 감독의 능력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앤 헤서웨이와 제시카 차스테인을 하나의 앵글 속에서, 그것도 서로의 연기력이 정면에서 충돌하는 종류의 것으로 지켜볼 수 있다는 것 역시 이 작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경험이다.


다만 셀린의 광적인 집착을 표현하기 위해 마련된 후반부와 결말의 매듭에는 아쉬움이 남는 것 또한 사실이다. 테오를 가운데 둔 두 엄마의 모습, 진정한 의미의 모성애와 뒤틀린 모성애가 표현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이후 정확한 하나의 장면을 완성해 보여줄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영화가 설정하고 있는 방향의 선택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이 영화의 마지막에 놓이는 것은 비틀린 광기다. 인물의 그런 심리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 역순으로 다시 따르는 일은 이 영화가 훨씬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런 아쉬움을 모두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이 글은 24.04.05.에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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