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의 시간 동안 나태해진 나를 되돌아보며, 그리고 나아가고자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이 많은 실의에 빠져있다.
혹자는 일자리를 잃고 혹자는 사랑하는 이와 강제적으로 일시적이거나 영원한 작별인사를 해야 했고 혹자는 생에 경험해보지 못한 판데믹을 무미건조하게 관망하고 있으리라.
위에 사연들에 대해 주르륵 나열할 수 도 있겠지만, 이 글은 나에 대한 케이스에 대해서 말하려 한 것이기 때문에 스킵하고..
나의 경우에는 코로나가 나의 삶의 영향을 끼친 하나의 ‘계기’라고 말하고 싶다.
3 년 전, 회사 생활을 하던 나는 재수가 없게도(굳이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사소한 사건으로 큰 수술을 하게 되어 회복을 위한 휴식이 강제로 주어졌다.
퇴원을 하고 사회 속에서 안정을 취하던 무렵, 나만이 열심히 일하며 하루를 보내는 무리들에서 튕겨져 나와 도태되었다고 생각했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가 하나의 숙제였다. 하루라는 거머리는 지리멸렬히 내 곁에 꼼짝 않고 곁에 꼭 붙어 서서 여유나 바쁨을 느낄 틈도 주지 않고 그 모두를 쪽쪽 빨아먹으며 순간을 권태롭게 했다.
남들에게 시선을 돌리면, 그들은 시간과 업무에 쫓겨 수많은 일들을 소화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가끔 만나 그간의 안부를 이야기할 때면 일과 상사에게 치여서 너무 힘들다고 칭얼대듯 나에게 말하곤 했다.
그것은 나에게는 하루하루를 보람차게 보내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나에게 회복을 위해서 무조건 “쉬어라”라고 말하는 것이 꽤 거북하기도 했다.
그 말이 부럽기도 하고 나도 권태로움과 보람이 없는 일상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퇴원 후 충분히 쉼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하루를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사로 복직했다가, 또 체력에 못 이겨 다시 집으로 복귀했다 다시 복직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러한 만행은 회사에서만 했던 행동들이 아닐 것이다. 공적인 자리 이외에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더욱 만연했었으리라.
이러한 만행이 타인들에게 누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갈 길을 잃어 상대방에게 충고나 조언을 얻을 때에도 정작 귀 기울여 소화시키려고 했다라기보다는 내 식으로, 내가 생각하고 싶은 방향대로(대부분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고 소화하지 않았을까?
최근 코로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실의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공동의 실의에 오히려 마음의 안정을 찾은 카뮈의 ‘페스트’에서의 코타르 같다.
결국 페스트는 그에게 이롭게 작용했다. 페스트는 고독하면서도 고독을 원치 않던 사람을 공범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가시적으로 그가 바로 공범이고 또 기꺼이 즐기는 공범이기 때문이다. 코타르는 자신이 보는 모든 것, 즉 여러 종류의 미신, 당치 않은 두려움, 경계하는 영혼들의 과민성의 공범이다. 가능한 한 페스트 이야기는 안 하기를 바라면서도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하는 그들의 괴벽, 그 병이 두통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 조금만 머리가 아파도 질색하며 파리 해지는 그들의 모습, 그리고 사소한 기억 상실을 큰 일로 변질시켜 바지 단추 하나만 잃어버려도 슬퍼하게 되는 신경질적이고 격해지기 쉬운 감수성, 결국 불안정한 감수성의 공범이다.”
-알라딘 eBook <페스트 초판본> (알베르 카뮈 지음, 변광배 옮김) 중에서
가능한 한 그는 공포 속에서 편안하게 지낸다. 하지만 그는 그들보다 앞서 이 모든 것을 느꼈기 때문에, 내 생각에 그는 이런 잔인한 불확실성을 그들과 똑같이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페스트로 인해 아직 죽지 않은 우리 모두처럼 그 자신의 자유와 생명이 매일 파괴되기 직전에 있음을 그는 잘 느끼고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공포 속에서 산 적이 있기 때문에, 그는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공포를 겪게 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포는 이제 그에게 그가 완전히 혼자였을 때보다 짊어지기에 덜 무거워 보인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가 잘못된 것이고, 또한 그를 이해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알라딘 eBook <페스트 초판본> (알베르 카뮈 지음, 변광배 옮김) 중에서
불안감이 만연한 이런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겪는 고통에 위안을 느꼈다. 그러면서 다시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큰 사건은 벌써 3년이라는 시간에 가까워지면서 아픔, 고통들은 점점 퇴색해지기 시작했고 다시금 예전의 일상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것이 꾸물꾸물 올라왔다.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 오랜만에 연락을 취한 친구와 함께 호흡을 맞추기로 했다.
그가 하는 사업에서 필요한 영상들을 찍어 편집하는 일이 었는데 10년 동안의 세월 동안 친구라는 관계였지만 비즈니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나에게 했던 충고는 다른 사람의 충고 보다도 더 크고 강하게 다가왔다.
“비즈니스를 하면서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 계속해서 보상을 먼저 바라고 이야기하는 거는 보상을 주고 싶다가도 오히려 도망가게 된다.” “너 손에 아무것도 없는데 너를 뭐 믿고 일을 주고 싶겠냐.” “돈은 좇으면 도망가고 돈이 너를 쫓도록 해야 한다.”
아! 내가 혐오하던 인간상의 말들을 내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밌어 보이면 바로 움직였던 내가, 이제는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얄팍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무 부끄러웠다. 구차한 변명이라도 늘어내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씁쓸한 말이지만 분명 고쳐야 할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아마 속으로는 ‘이것이 아닌데’ 하면서 느꼈던 것이었는데, 주체성 없이 지냈던 지난날, 스스로 책임지기 싫어 남들의 조언 뒤에 숨어서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하는, 무책임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제야 이것이 나를 짓누르는 것을 느꼈고 이를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약이 쓰다고 뱉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고 참으면 분명 나에게 이로운 자양분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과 같다. 여태 경험으로 배웠던 것들에 대해 자만하지 않고 다시금 낮은 자세로 그들의 조언을 겸허히 받아들이고자 한다. 있는 힘껏 도약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