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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민 왔습니다.

낮에는 그래픽 디자이너, 밤에는 배달 라이더

by 원석


디자이너 이야기를 매거진으로 쓰다가 중단했다. 어릴 적 이야기부터 하고 싶었다.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꿈을 가졌는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렇게 적다가 그만뒀다. 처음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자 해서 썼는데 에피소드를 적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정작 하고 싶은 디자이너에 대한 이야기가 잘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매거진을 삭제했다. (글은 남아있다.)


글이란 건 만만히 볼 게 아니구나. 작가는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내가 디자이너인 것처럼 글 쓰는 직업이 작가인 것처럼. 쉽게 볼 게 아니구나. 장문의 글이 얼마나 어려운지 배웠다. 호흡을 이어간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배웠다. 요즘처럼 짧고 빠르게 소비되는 글과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에 긴 글을 적는다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짧고 빠른 미디어에 익숙한 내 탓이었다. 미디어 탓이 아니고.


이제 무슨 글을 써야 할까. 솔직한 글을 쓰고 싶고, 공감되는 글도 쓰고 싶고. 헌데 언제나 글다운 글을 쓸 수 있을까. 기다리는 분은 없겠지만 어쨌든 디자이너 이야기를 올렸던 매거진이 없어졌다는 얘기는 하고 싶었다. 아니 기록하고 싶었다.


요새 시간 날 때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디자인 일이 너무 많이 줄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오토바이 배달이라도 해야 한다. 유행한다는 투잡이다. 하다 보니 역시 큰돈은 안 된다. 그래도 안 할 수가 없다. 삶은 그렇다. 내몰리고 절벽까지 가면 뭐라도 해야 한다. 나 혼자의 삶이 아닌 지금, 돌아설 곳이 없다. 그래도 20대에 오토바이 퀵서비스 경험이 있어서 타는 건 금세 익숙해졌다. 그런데 가끔 현타가 온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지. 나름 디자인 스튜디오 대표라는 사람이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크록스 샌들을 신고 식당에 들어가 "배민입니다!"라고 소리치는 꼴이라니. 이상하다. 오토바이로 일은 다시 안 할 줄 알았는데 나이 50이 되어 다시 타고 있다.



현실은 그래도 봐주지 않는다. 엄살 부리는 얘기를 해도 들어주지 않는다.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 삶이니 변명할 것도 없잖은가. 이 일이 없으면 다른 일을 할 수박에. 배달 일이 부끄럽지는 않다. 배달하시는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하고 있던 일과 너무나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내가 한심스러울 뿐. 그래도 일을 안 하고 손 놓고 있는 게 부끄러운 거지, 일하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잖나. 감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건강히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오토바이를 구매할 돈을 융통할 수 있어서 이렇게 일하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다음 주면 워크아웃을 하러 신용회복지원센터에 상담하러 간다. 대출금을 낼 수가 없다. 그러니 자꾸 빚이 늘어간다. 어떻게든 이자를 줄이고 숨 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도 이런 제도가 있어서 다행이다. 실패야 살다 보면 안 할 수 없는 거고 그때마다 주저앉을 수는 없으니 그래도 좋은 날 오리라고 살아간다. 하지만 여전히 디자인 일을 계속 하는 게 맞는지 고민이 된다. 정답 없는 숙제 같다.


배달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디자인하는 배달 라이더. 뭐가 됐든 일을 한다는 건 변함없으니. 살아봐야겠다. 살아 있으니 산다는 누구 말처럼. 살아 있으니 살아야겠다. 아내와 아들들을 위해. 배달통에 음식을 싣고 배고픈 이들에게 양식을 배달해 줘야겠다. 디자인은 마음의 양식, 배달은 육의 양식. 뭐 별다를 건 없네. 살자. 살자. 살자.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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