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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Dec 08. 2023

풍성한 시간을 누릴 수 있도록

크로노스, 카이로스 그리고 아이온의 시간

학부모님 안녕하세요.

영림중학교장 윤상혁입니다.


다사다난했던 2023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학부모님들은 올 한 해를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가장 기뻤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가장 슬펐던 일은요? 가장 재미있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가장 마음이 따뜻해졌던 순간은요?  나이가 들수록 주변에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정말 일 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모르겠다.”

“벌써 2023년이 끝나간다는데 믿어지지 않는다.”

“새해가 되어도 별로 감흥이 없다.”      


누군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열 살 아이에게 일 년은 자기 삶의 십 분의 일, 즉 0.1에 해당하는 시간이지만 마흔 살 어른에게 일 년은 자기 삶의 사십 분의 일, 즉 0.025밖에 되지 않는다고요. 즉 살아온 시간이 길수록 한 해가 짧아진다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이런 설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줄어드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숙명이 되어버리니까요.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를 읽어보셨는지요. 이 소설은 시간의 의미와 삶의 방식에 대해 많은 것들을 성찰하게 해주는, 청소년 소설로 분류되지만 사실은 어른이 읽어야 할 책입니다. 어느 날 모모가 사는 마을에 회색 신사들이 들이닥칩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시간은 귀중한 것, 잃어버리지 말라! 시간은 돈과 같다. 그러니 절약하라!”고 외칩니다. 이를테면 이발소에서 일하는 푸지 씨에게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찾아오는 손님을 이발하는데 한 명당 30분씩 걸렸으니 잡담 하지 말고 15분으로 줄여라. 노래하고 책을 읽고 친구들을 만나느라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라.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양로원으로 보내라. 과연 회색 신사들의 조언을 듣고 푸지 씨의 시간은 늘어났을까요? 마을 사람들이 시간을 저축할수록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점점 줄어듭니다. 결국 회색 신사들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 사람은 모모였지요. 모모는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의 마음속에 깃들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영화 모모(Momo, 1986) 포스터(좌)와 프랑스의 도시학자 카를로스 모레노(우)



‘15분 도시’라는 개념을 주창한 프랑스의 도시학자 카를로스 모레노는 시간의 세 가지 의미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 크로노스(Krónos), 카이로스(Kairos) 그리고 아이온(Aion)이 그것입니다. 크로노스는 물리적 시간, 즉 흘러가는 시간을 말합니다. 카이로스는 창조성이 행동으로 이어져 새로운 것을 만드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카이로스는 날개 달린 대머리 남자로 나타납니다. 그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창조하는 순간 눈이 뜨이고 카이로스가 보입니다. 그때 그의 머리카락을 잡으면 날개를 펼치고 우리를 멀리 데려가 주죠. 세 번째 시간은 아이온입니다. 아이온은 성찰의 시간입니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성찰을 하고 지상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학창시절을 그리워합니다. 그때가 어렸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학창시절이 우리의 기억에 깊이 각인되어있는 이유는 그때의 시간이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닌, 카이로스의 시간이자 아이온의 시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니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도 학교가 소중한 공간이라면 그것은 카이로스의 머리카락을 붙잡는 순간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규격화된 시간 속에 아이들을 얽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골똘히 생각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죠.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잡는 삶이 아닌,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삶. 그것이 점점 더 줄어드는 우리의 시간을 확장시킬 수 있는 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올겨울, 아이들과 함께 풍성한 시간을 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림중학교장 윤상혁 드림




Momo, by Michael Ende


 이 글은 영림중학교 학부모소식 <영울림> 제16호(2023년 12월)에 수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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