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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ossenzersdorf Jul 15. 2016

헝그리 하트

원래 나는 블로그에서 맛집을 찾지 않는 편이다. 그런 걸 잘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 영화에 대한 블로그들의 비평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는 블로그들의 이 영화에 대한 비평들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 대한 많은 비평들이 키워드로 삼는 게 '결핍', '모성', '어긋남'과 같은 것들이다. 글쎄. 이 영화를 양육 방식의 차이에서 생긴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주드가 미나의 양육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그런 방식으로 아이를 키운다면 해피엔딩으로 끝날 영화일까? 단순히 차이라고 하기엔 이 영화에서 이미 아이는 영 좋지 못한 상황이다. 이 이야기는 엄격한 훈육 방식을 고수하는 아버지와 온화한 훈육 방식을 주장하는 어머니 사이의 갈등과 같은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포스터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내 관점에서 보면 이 포스터는 <지구를 지켜라>의 포스터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포스터를 감독이 직접 만들지는 않으니 어쩔 수는 없는 일이지만 가끔 너무할 때가 있다.


육아 스릴러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본래 육아물이거나 스릴러물일 리는 없다. 어떻게든 고기를 먹이려는 아버지와 어떻게든 고기를 막으려는 어머니 사이에 숨막히는 긴장이 이 영화를 흥미롭게 끌어가는 요소이긴 하지만 그 긴장감을 위해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아이에게 균형잡힌 식사를 제공하자'는 캠페인을 위한 육아 영화일 리도 없다.


이러한 해석들은 영화가 주는 의미를 영화 안에서만 어떻게든 찾으려 한 게 아닌가 싶다. 영화 안에 등장하는 '대체의학'이나 이 영화의 원작 제목이기도 한 '인디고 차일드'라는 단어에 주목한다면 영화 안의 상황이 다시 보이지 않을까 싶다. 원작을 보지 않았으니 정확한 건 모르지만 원작인 소설은 이탈리아가 배경인 것으로 알고 있고 실제로 이탈리아에는 엄격한 채식주의를 유아에게도 적용하는 부모 탓에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유아들이 있다고 한다. 어째서 영화의 배경이 뉴욕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실존하는 사회문제와 관련된 영화다.


이 영화에서 미나는 시종일관 현대의학을 거부한다. 그리고 엄격한 채식주의를 고수한다. 병원에 가야 할 때는 대체의학을 도입하는 의사들을 따른다. 그 외에는 자신이 대체의학 등에 대한 직접 책을 보면서 연구한다. 집은 늘 어둡게 하고, 절대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한다. 옥상에서 직접 기른 채소로만 식사하며, 아이에게 먹인다. 그에게 동물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독이다. 주드가 이런 태도에 폭발해 결국 미나는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육식을 허용하지만 특수 오일을 이용해 고기로부터 나온 성분이 섭취되지 않게 막아버린다. 아이는 영양실조로 늘 몸이 뜨겁고 성장이 멈춰버렸지만 미나에게 열은 그럴 수 있는 일이고, 아이의 성장을 또래와 비교하는 것을 거부하며 혐오하기까지 한다.


이 영화는 조금 허무하게 끝이 난다. 주드는 미나의 양육 방식으로부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아이를 자신의 어머니의 집으로 납치한다. 그 곳에서 아이는 고기를 먹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하지만 미나는 자신에게는 '독'으로만 보이는 육식을 아이에게 제공하며, 박제한 사슴이 곳곳에 배치된 시어머니의 집에서 키우게 할 수는 없었고 결국 공권력을 동원해 아이를 되찾아 온다. 그리고 이 상황을 참을 수 없었던 시어머니는 총으로 미나를 쏴서 죽여버린다. 미나는 죽고, 주드의 어머니는 감옥에 가고, 주드는 아이를 키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주드의 어머니가 감옥에서 한 말이다. '저는 제 신념대로 했습니다.' 이 말은 물론 표면 상 주드의 어머니가 미나를 죽여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지만 영화 전체를 놓고 보면 미나가 했을 말처럼 보인다.


미나에게 물어보면 당연히 자신은 아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친구도 안 만나고,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늘 어두운 곳에서 생활하며 먹을 것도 직접 기른 채소로만 제공한다. 아이에게 해가 되는 것을 먹이려는 아이 아버지로부터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아이가 고기를 먹은 후에는 늘 아이에게 특수 오일을 먹게 한다. 그는 진심으로 아이에게 헌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아이에게 진심으로 제공하는 것들이 아이에게 최선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험하다. 만약 이 영화의 키워드가 '모성'이라면 모성과 부성의 대립이 문제가 아니라 이 따위의 일도 모성의 이름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내가 보는 미나의 문제는 대체의학을 신봉하거나 자식을 인디고 차일드라고 생각하거나 엄격한 채식주의를 아이에게 적용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라서 그릇된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또 한 사회에서 그릇되다고 여겨졌던 생각이 시간이 지나면 옳은 것으로 밝혀지기도 하니 그릇된 생각 자체를 여기서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미나의 태도다. 미나가 조금은 허무했던 죽음이라는 결말을 맞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미나가 앞으로 대체의학이나 엄격한 채식주의에 대한 생각을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애초에 미나가 스스로 틀렸다고 생각할 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미나는 자신이 대체의학을 믿으면 그 대척점에 있는 현대의학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버리기 때문에 '병원에 데려가서 물어보기라도 하자'는 주드의 외침이 완전히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아이에게 2주간 열이 있어도, 아이가 자라지 않아도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지 않는다. 미나의 머릿속에서 현대의학은 자신과 아이를 해치는 존재라고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현대의학에서 문제삼는 것들이 정보로서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반증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진짜 문제다. 만약 미나가 자신의 철학을 고집하다가 이 영화의 결말이 미나의 죽음이 아니라 아이의 죽음이 되었다면 미나는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두번째 아이는 잘 키웠을까? 아니면 집을 더 폐쇄적으로 만들고 더 한정된 식품만을 섭취하는 방향으로 극단주의를 택할까? 나는 후자라고 본다.


이성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지구촌의 많은 끔찍한 일들이 이성의 이름으로 일어나곤 했다. 이 영화에서도 정작 끔찍한 건 미나가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이는 게 단순히 현대의학에 대한 악감정과 대체의학에 대한 호감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엄격한 채식주의, 인디고 차일드, 대체의학 등은 나름의 논리 체계를 가진 이론들이고 미나의 이성은 미나가 그 끔찍한 일을 벌이는 동안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영화에서 미나는 객관적으로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 와중에도 확고한 자신만의 이론을 갖고 있으며 책을 보면서 공부한다. 미나는 비이성적인 동시에 이성적이다.


현실에서 영화로 들어갔으니 다시 영화에서 현실로 나와보자. 이 영화는 우리나라 영화도 아니고, 방금 개봉한 영화도 아니지만 우리에게 꼭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성혐오니, 남성혐오니 하는 신종 사회갈등은 물론이고 지역주의(여기서 지역주의란 단지 자기 지역에 전철역 하나 더 놓자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상대 지역을 적대시하고 그 지역민들을 나쁜 사람들로 몰고 자기 지역을 성역화하거나 피해자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을 말한다.) 같은 해묵은 갈등도 각자에게는 나름의 이론체계가 있다. 그리고 (주로 일부의 사례를 과장한 것이거나 유리한 자료를 가져다 쓴 것이지만) 나름의 근거도 있다. 심지어는 일베나 유사 커뮤니티 혹은 그 대척점에 있는 커뮤니티 등 비슷비슷한 수준의 커뮤니티들도 자신들만의 터무니 없는 이론들을 발전시키곤 한다. 일베는 자신감이 과도한 나머지 굳이 여기저기 깽판을 치고 다녀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말하고 다니는 말들 예를 들어 5.18 폭동설같은 것들이 정말 터무니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지만 그 외에도 자신만의 교리를 형성해나가는 커뮤니티는 많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자기들끼리의 이론을 형성해나가기 때문에 비판을 받을 일도 없고 그래서 자기들끼리는 당연히 옳은 줄 안다. 그리고 그 무리에 속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과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서로 말이 통할 리가 없다. 미나가 주드나 시어머니와 말이 통하지 않았듯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모두가 자기가 가진 신념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합리적으로 대화하고, 자신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었을 때 타인의 주장을 수용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물론 그 전제는 상대를 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공론의 장에서 자신들이 내놓는 근거가 정말 사실인지, 사실이긴 한데 진실은 없는 사실인지, 단어에 대한 정의는 올바른지, 추구하는 가치가 정말 추구할 만한 것인지 등에 대해 치열하게 논의하고 그 결과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5.18 폭동설을 주장하던 일베충과 논쟁을 했던 기억을 되짚어보면 그들은 북한군 침투설 등 허위 사실을 토대로 이론을 전개하는 경우도 있었고, 폭동의 정의를 바꾸어 실패한 사회운동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고(당연하지만 성공여부로 폭동인지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만약 실패했지만 좋은 의미로 일어난 폭동이란 게 존재할 수 있다면 그 자신들이 먼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 의미를 깎아내리기 위해 폭동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단지 실패한 사회운동이기 때문에 폭동이라고 말하는 건 단지 말장난일 뿐이다.), 심지어 내가 본 많은 일베충들은 자신들의 밑천이 다 드러나자 지역차별성 발언으로 물타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지역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들은 지역주의의 내용 중 가장 황당했던 것 중 하나가 경상도 노론이 조선을 망쳤다는 것이다. 노론의 지역기반은 기호지방이지 영남이 아니다. 영남을 지역기반으로 한 건 그 반대쪽에 있었던 남인이다. 노론 중에 경상도 출신이 없지야 않았겠지만 메이저리티도 아니었고 당연히 나라를 망칠 힘이 있었을 리도 없다. 정말 노론의 지역기반이 경상도였어도 나라를 망친 게 노론인지, 세도정치인지, 그걸 막을 수 없었던 시스템인지, 조선의 사회경제적 구조가 문제인지 따질 게 한가득인데 기초적인 사실관계부터 틀렸으니 그 말이 맞을 리는 없었다. 참고로 나에게 경상도 노론 망국론을 펼쳤던 그 분은 나에게 반격을 당한 뒤 어떻게든 경상도 사람들의 흠결을 찾으려는 편집증적 태도로 일관했다. 그냥 근거가 틀렸으면 주장을 폐기하면 되는데 영화 속의 미나가 '대체의학은 맞고 현대의학은 틀리다.'라는 게 반증불가능한 절대명제이듯이 이 분에게도 '경상도는 나쁘다.'가 절대명제다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사실 나도 고향이 전라도인 건 그 분과 마찬가지이니 포기하고 그냥 맞다고 했으면 편하기야 했겠지만 그런 형편없고 위험한 논리에 동의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운 좋게도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 중에 합리적인 사람들을 꽤 만났고 이야기할 기회가 꽤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과 서로 달리하는 견해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즐긴다. 적어도 나는. 어쩌면 큰 축복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서로 생각이 다른 건 당연하다. 또 틀리는 건 두려운 게 아니다. 원래 인간은 불완전하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상대를 적으로 인지하고 서로 대화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많아지는 것이다. 스스로도 미나같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다들 미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과 함께 미나가 아닌 사람들의 사회를 만들자는 뜻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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