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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은 Apr 21. 2019

짜증이 흩어진다

대책없이 다정한

아침에 유리잔이 깨졌다. 싱크대 안에서 혼자 펑. 하고 싱겁게 터져버렸다. 별일이네. 


원래도 잘 놀라는 나는 이번에야말로 크게 놀랐다. 나는 가끔 내 그림자를 보고도 놀란다. 결혼하고서는 퇴근한 남편을 보고 기절할 만큼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한 번은 요리하다가 야채들이 공중으로 다 날아갔고, 또 한 번은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허리를 삐끗했다. 그 뒤로 남편은 집에 들어올 때마다 입구에서부터 "나 왔어요 나 왔어 나왔어요 나요나" 하면서 들어온다. 갑자기 나타나면 내가 또 놀랄까 봐 점점 목소리를 키우면서, 크레센도로.


유리잔이 깨진 걸 확인하다가 집게손가락에 새 눈물만큼 피가 났다. 나에게 남편이 통통통 뛰어온다. 내가 깬 거 아니야. 정말 가만히 있다가 혼자 깨졌어. 너무 황당해 정말. 이케아 유리잔 다시는 사지 말아야겠어. 무서워 아침부터 짜증 나. 한참 중얼중얼하다가 돌아보니 남편이 없다. 아니, 어디 간 거지. 나 피나는데. 유리잔 때문에 났던 짜증이 갑자기 남편에게로 향한다.


남편은 빨간색 약상자를 안고 돌아왔다. 치료를 해주겠다고. 이것저것 약이네 반창고네 도구들을 꺼내놓는다. 상처가 너무 작고 피도 금방 멎어버려서 어딜 다친 건지도 안 보여 여보. 정말 괜찮아? 하더니 약상자를 들고 다시 돌아서는 남편. 내 짜증은 다시 유리잔에게로 돌아간다.


유리잔이 깨지기 직전에는 내가 커피 가루를 쏟았더랬다. 커피 기계 안에도 잔뜩. 선반에도 잔뜩. 바닥에도 그만큼. 남편은 말없이 와서 커피 가루들을 물티슈로 훔친다. 엉성한 손길에 커피 가루들이 자꾸만 물티슈 밖으로   떨어진다. 잘 좀 해봐. 내가 잘못했는데 내 짜증은 또 남편에게.


다치지 않았으면 다 괜찮아. 중얼중얼. 남편은 다 들리는 혼잣말을 한다. 커피 가루에 다치는 사람도 있나. 엉뚱하긴. 남편의 대책 없는 다정함에 짜증은 다시 나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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