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이 Dec 31. 2020

피아노학원에서 화장실로 가는 길

책 ‘프라하로 여행하는 모차르트’를 읽고

책이 너무 예뻐서 샀다. 정말 읽을 생각은 없었고, 속초에 놀러가 신나는 마음에 예쁜 악세사리 사듯 가벼운 책을 하나 집은 것이다. 정말로 그 용도로 몇 주동안 책장에 전면으로 서있었다. 그러다 한번 읽어볼까 싶어 후루룩 넘기다 신기한 경험을 했다.


1. 지루할 법 한데 계속 읽고 있는다.

묘사로 시작해 묘사로 끝난다. 그래서 내가 읽으며 상상한 그 공간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표정이 이 글을 쓰는 하루 뒤도 기억이 난다. 묘사에 압도되어 이제 재미가 없을라 치면 ‘계속 읽어볼까?’하는 포인트가 등장한다. 그게 대단한 유머가 있는 것도, 갑자기 전개가 빨라지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24시간도 안되는 시간이 담긴 글이라 반전이 일어나기엔 시간도 맥락도 모자라다. 상황의 긴장과 눈에 들어오는 문장, 갑자기 개입하는 작가. 그거면 책을 덮지 않고 계속 읽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독자들이 이런 묘한 기분을 한번 느껴 보기를 바란다. ... 우리는 일상적인 자아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동시에, 그것을 두려워한다. 무한한 어떤 것이 다가와 나를 어루만지며 가슴을 조이게 하고, 또 그 무한한 것이 내 가슴을 확장시키고 영혼을 강력하게 낚아채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완성된 예술에 대한 경외감에 휩싸이고, 신적인 경이로움을 맛보고, 그것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는 생각에 일종의 감격, 거의 자부심까지 갖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행복하고 가장 순수한 자부심이 아닐까 한다.




2. 갑자기 피아노학원의 화장실로 갔다.

묘사 덕분인지,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때까지 다니던 피아노학원이 생각났다. 그것도 피아노를 치는 모습이 아니라 화장실을 가는 나.


내가 다니던 피아노학원은 시장 입구에 있었는데 오래된 건물이었다. 하지만 위치가 좋아서 1층에 사람들이 그득한 곳이었다. 올라가서 옛날 갈색 철제 문에 울퉁불퉁한 유리가 중앙에 있는 문을 열면 넓은 입구가 보이고, 왼편엔 신발장이 있었다. 얼마나 넓으면 피아노차가 오는 시간에 초등학생 10명이 동시에 갈아신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은색 알루미늄 문이 달려있고 문을 열면 옛날 주택의 2층 복도 같은 좁은 공간이 나왔다. 그 끝에 먹이 섞인 파랑색의 나무문이 달린 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은 쪼그려누고 줄을 당겨 물을 내리는 곳이었다. 작은 초록색타일이 가득 박혀있었고 문짝엔 선생님이 색연필로 그린 것 같은 하트 모양의 종이에 세글자의 무언가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큰 욕실화를 끌며 다시 알루미늄 문을 넘으면 7개의 피아노 방이 벽을 따라 있고 중앙엔 무대와 전자 그랜드피아노가 있었다. 콩쿠르 나가기 전에는 무대경험을 키운다고 전자피아노를 쳐야할 때가 있었다. 건반이 너무 가볍고 누르는 세기에 따라 강약조절도 되지 않아서 실전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대 앞엔 유치원에나 있을 법한 합치면 타원이 되는 테이블이 있었고 거기에 구겨져 앉아서 이론 문제집을 매일 1장씩 풀었다. 때론 다 풀고 싶어서 10장씩 풀고 있으면 혼이 났다. 책값을 걱정해 주신 걸까. 그리고 테이블 옆에는 선생님 방이 있었다. 반쯤은 유리로 되어있어서 안이 훤히 보였고 중앙엔 초록 부직포를 깐 테이블이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가 앉아 있을 때는 교습비를 낼 때였다. 노란 교습비 봉투는 한달에 한 번씩 칸에 싸인이 되고, 12개가 다 채워지는 1년에 한번씩 새걸로 바뀌었는데 다 떨어진 종이 봉투를 들고다니다가 빳빳한 봉투를 들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피아노 학원 가방은 집에 피아노가 없어서 학원에 넣어두었는데, 가방을 받자마자는 일부러 들고다녔다. 빳빳한 네모난 가방. 무거웠지만 어떠랴. 새 것을 사랑해 마지 않았던 어린 나는 그걸 옆에두고 꽤 쓰다듬었다. 그렇게 마치고 나면 쾌쾌한 오래된 계단을 타고 내려가 집으로 간다.


여기에 적지 않은 부분들까지 세세히 모두 기억이 나서 매끄럽지 않게 블러처리 된 듯한 기억이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공간이 창고였는지 벽이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난다. 이 생각에 몰입하다보니 새벽을 훌쩍 보냈다. 마치 지금 처럼. 오늘도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다 새벽 3시가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좋아하는 일은 이렇게 만드는 겁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