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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진희 Aug 30. 2024

제11화. 뒷북치는 육아

아기를 낳고 나니,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당연하게 여겼을지 모를 아기가 잘 먹고, 잘 자는 모습이 매 순간 귀했고, 하루를 무사히 보낼 때마다 안도했다. 겨우 몇 백 그램의 몸무게가 늘었다는 소식에도 마냥 기뻤다. 아기가 ‘엄마! 걱정 말아요! 나 잘 크고 있어요.’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감정의 고조를 겪는 중에도 시간은 여지없이 흐르고 있었다. 조리원 생활의 2주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신생아를 돌보는 일은 여전히 서툴렀고, 앞으로 어떻게 키울지를 걱정했다. 조리원 선생님은 신생아 돌봄에 관해 이것저것 질문하다 한숨을 내쉬는 나를 보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키우다 보면 다 도가 틉니다. 실수하고 부딪치다 보면 다 하게 되어 있어요.”

처음에는 나도 곧 도가 틀 거라는 말로 들려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곧, ‘실수하고 부딪치는 과정’이 달갑지 않았다. 엄마로서 앞으로 맞이하게 될 모든 순간을 온전히, 의연하게 겪어낼 마음의 준비까지는 아직 못한 것이었다.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는 생각은 문득문득 여전했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울음은 친정엄마 앞이었다. 엄마와 통화하다 무엇에 터졌는지, 울지 않은 며칠 치의 눈물을 쏟았다. 눈물이 마른 줄 알았더니 고이고 있었나 보다. 엄마는 울지 말라며, 같이 울었다. 울다 보면 울지 않을 날이 올까? 조리원에서의 마지막 밤은 떨리는 마음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고된 신생아 육아의 서막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보통 신생아는 두 시간마다 먹는데 얘는 한 시간마다 먹으려고 해요. 엄마가 조절해줘야 할 거예요.”

조리원에서 들은 마지막 당부였다. ‘엄마가 조절해줘야 한다’는 게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 한 시간마다 먹으려고 한다는 것은 수시로 울 거라는 뜻이었고, 엄마가 조절해줘야 한다는 것은 안고 달래야 한다는 의미였다. 아기가 울면 더 먹게 해 주면 되지 않나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신생아의 신장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하루 분유 양은 1,000ml를 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권고 사항이 있었다.

수유를 기록하는 어플이 착실하게 총량을 체크해 줬고, 엄마는 더 먹여야 하나, 말아야 하는 내적 씨름에 끙끙거렸다. 그러다 언젠가 한 번, 양껏 먹였더니 아기가 낮잠을 푹 잔 일을 겪고 나서야 깨달았다.  배부르게 먹게 하고, 텀을 2시간 이상으로 늘려봤으면 어땠을까? 그런 요령을 몰라서 칭얼거리는 아기를 안고 낮잠 재우기가 고행이었던 아기도, 나도 고생한 시기가 너무 아까웠다.

두 시간마다 분유 먹이고, 틈틈이 모유 수유하고, 안아서 낮잠 재우고, 놀아주고, 기저귀 갈고, 빨래하고, 젖병 설거지하고 소독하고, 목욕시키고, 청소하고…. 그런데 그렇게 몸이 바쁘고, 고된 일상을 사는데도 여전히 생각은 많았고, 잠은 깊게 못 자고, 입맛이 없는 혀는 깔깔했다. 새벽녘 불현듯 깨어 불안에 뒤척이는 밤도 잦았다.


그런 중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꺼려져서 망설이다가 “낮에 아기 맡겨놓고 잠깐 잠이라도 잘 수 있는 게 어디예요?”라던 지인의 말에 기대 없이 산후도우미 서비스를 신청했다. 친정 엄마가 열흘 정도 산후조리를 도와주시고 간 후, 우리끼리 고단한 주말을 보내면서 산후도우미가 오는 월요일이 무척 기다려졌다.


벨소리에 현관문을 열자 단정한 차림의 중년 여성이 서 계셨다.

  “어서 오세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분은 도착하자마자 능숙하게 일을 해나갔다. 빠른 속도로 쓱싹쓱싹 방 정리와 청소를 마치고, 아기를 깨끗한 자리에 눕혔다. 그리고 반찬 몇 가지를 순식간에 만들어 밥상을 차려주고, 아기를 볼 테니 나 보고 밥을 먹으라고 하셨다. 아기의 손에 관해선 놀라고 마음 힘들었겠다고, 그렇지만 잘 키울 수 있고, 잘 클 거라고 담백하게 위로해 주셨다. 그러면서 내게도 고맙다고 하셨다.

  “이 일을 십 년 넘게 해 왔지만,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는 처음 받아봤어요. 산모들이 산후도우미를 처음 만나는 날, 불편해하고 긴장하지만 사실은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이번에는 어떤 엄마와 아기일지, 주거 환경은 어떨지 긴장되는 마음으로 처음 벨을 누르거든요. 보통은 ‘안녕하세요’라고 하지 ‘어서 오세요’라고는 안 해요.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은 그동안 받아보지 못한 환대여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이 울컥했어요.”     


만삭 시절에 산후도우미 신청 가이드 브로셔를 본 적이 있다. 산후도우미 역할 중에 ‘산모 말벗’이라는 단어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겪어보니 과연 큰 역할이었다. 쫓기지 않고 편안히 밥을 먹고, 밤에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 것 이상으로 그 분과 나누는 대화는 나를 많이 안정시켰다.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주말 동안 나는 더 우울했고, 온갖 상념으로 어지러웠다.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4주를 신청했을 텐데 중간에 기간 연장은 안 된다고 해서 결국 처음 신청한 대로 2주 만에 선생님과 이별을 해야 했다.

2주 동안 정이 듬뿍 들어 선생님을 떠나 보내는 날, 나는 내가 신혼 시절에 취미로 만들었던 퀼트 가방을 선물로 드렸다. 선생님은 수공예품이 고가라서 갖고 싶어도 구경만 했었다고, 이리 귀한 걸 받아도 되느냐며 아이처럼 기뻐하셨다.      




아기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들고 만세 자세로 낮잠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그 곁에 서서 산후도우미 선생님이 깔깔 소리 내어 웃으셨다.

  “아유, 얘 좀 보세요. 너무 귀엽지 않아요? 사진 좀 찍어주세요.”

정작 엄마인 나는 그게 귀여운 건지도 모르고 있다가, 그분 말에 사진을 찍으며 ‘이게 귀여운 모습이구나’ 읊조렸다. 그동안 많은 신생아를 만나오셨을 텐데 아기를 처음 본 사람처럼 감탄하는 선생님의 시선과 웃음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쩌면 우리 아기 손의 이슈에 빠져, 편견에 갇혀있는 건 나였는지 모른다.     

신생아실 앞을 지나다가 아기가 침대에 눈을 뜨고 누워 있으면, 그게 그렇게 외로워 보였다. 그러면 마음이 아프고, 아기를 혼자 두는 엄마라는 죄책감이 몰려와 모자동실 시간이 아니어도 아기를 방으로 데려와 이런저런 말을 붙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이러한 감정은 이어졌다. 그래서 집안일을 하느라 아기를 혼자 둘 때는 마음이 자꾸만 괴로웠고, 아기가 외로울 것 같아서 그 곁을 떠나지를 못했다. 모빌에서 흘러나오는 단조로운 멜로디에도 마음이 서글퍼지곤 했다.

시간이 한참 흘러 지금에야 깨닫는다. 그때 외롭고 슬펐던 사람은 실상 아기가 아니라 나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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