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보스는 코리안 아메리칸이다.
그의 부모는 한국전쟁 직후 이민을 갔다. 특히 그는 한국에 오래 체류한 경험도 없었다. 평생 미국에서 엘리트로 살았다. 그 즈음 미국에서 태어난 2세 자녀들은, 언어를 완벽히 슥듭하고 미국 문화에 녹아들기를 바라는 부모의 간절함으로 한국어와 문화에 익숙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어렴풋이 알고만 있었다. 그런 보스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정착하는 것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것은 코로나바이러스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심지어 아직 무슨 변이며 백신이며 구체적인 정보는 아무것도 등장하기 전이었다. 감염되면 얼굴이 시커매진다는 둥, 사람이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도 전염을 시킬 수 있다는 둥 전 세계가 혼란에 빠져있을 시기라 뭘 어떻게 대응을 해야하는 지도 몰랐다. 비서로서 나의 첫 업무도 자가격리 해제기간과 해제 이후 첫 스케쥴 세팅이었다. (그때 처음 수립한 일정은 '마당 나가서 바람쐬고 샌드위치 먹기'였다. 보스가 이런 시간을 마련해줘서 고맙다고 한 기억이 나는데, 생각해보니 별 것도 아닌 일에 우리 둘 다 감동적이고 뿌듯하고 그랬다.)
이런 와중에 타국에 정착을 하기란 혼돈 그 자체였다. 모든 관공서는 운영 시간을 단축하기 시작했고, 콜센터는 확진자 발생으로 갑자기 닫아버리곤 했다. 게다가 내 보스의 비자 발급은 유독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던 터라 미국에서 필요 절차를 밟지 못한 상태여서, 비자가 없는 상태로 몇 주를 기다려야 했다.
본인인증의 덫
어느 토요일 밤중에 갑자기 핸드폰이 연신 울렸다. 단체카톡방은 물론이거니와, 말이 좀 많은 편인 친구라면 개인 카톡방마저도 알림을 꺼놓는 편이기에, 알림이 많이 오는 건 곧 안 좋은 소식이었다.
갑자기 쏟아진 카톡은 보스의 아내로부터 온 거였다. (아내는 한국말을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능숙하게 구사하는 편이었다.)
왜 핸드폰 본인인증이 안 되나요? 며칠 전부터 핸드폰 빌을 내라고 문자가 오는데, 무슨 프로그램을 깔라고 하는데 본인 인증??이 안된다고 해요. 본인 인증을 하려고 하면 그런 이름으로 가입된 번호는 없다고 하고, 통신사에 전화하면 주민등록번호를 알려달라는데 저는 그런 번호가 없어요. 병원에 가니까 똑닥? 똑딱? 이라는 데에서 웨잇리스트를 걸어둬야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앱은 왜 가입이 안되나요? 핸드폰 개통을 잘못 하신 거 아닌가요? 최대한 빨리 확인 바랍니다.
카톡을 읽은 직후에는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고, 몇 초 있으니 화가 났다. 내 잘못도 아닌 일을, 주말 한 밤중에 왜 내 탓을 하면서 화를 내지? 길을 걷다 갑자기 등짝을 얻어맞은 듯 급작스런 일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하나하나 읽어보니 설명할 일이 막막했다.
아내가 쓰던 핸드폰은 임시 휴대폰이었다. 보스의 비자가 늦어지고, 보스의 동거인 자격으로 발급되는 가족 비자는 그에 따라 더욱더 늦어진 거다. 급한 대로 회사 동료가 법인폰을 개통해서 빌려 주었지만 법인만 가지고는 카톡 같은 개인용 서비스가 되지 않는다. 법인폰에 왜 고지서 안내가 갔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내지 않아도 되는 요금 고지서이니 조회가 될리 만무했다. 신용카드 인증이라도 해보려 했지만 아직 한국에서 신용카드를 발급받기엔 체류 기간이 채워지지 않아 그도 불가능했다. (물론 카드 또한 비자가 있어야 가능하다.)
아이들이 어딘가 아픈거냐 물으니, 때 되면 맞아야 하는 예방접종이 있는데 자가격리를 하고 하느라 시기를 놓쳤다고 했다. 격리 기간을 버텨내느라 힘들었는지 여기저기 아프다고도 한단다. 사정을 설명했다면 똑닥을 설치하지 않아도 병원 진료를 받게 해주었겠지만, 완벽히 한국인같아보이는 그녀의 얼굴과 유창한 언어 때문에 한국 사정에 어두울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테다.
나는 어려서 잠시 외국에 혼자 거주한 적이 있지만, 그마저도 유학원에서 모든 걸 세팅해주고 몸만 가면 되는 거였기에 행정 업무를 보아야 할 일은 거의 없었다. 대학생이 되어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갔을 때에는 혼자 통장을 개설하고 핸드폰을 개통한 기억이 있지만, 학생 비자는 모든 비자 중에서 손에 꼽게 안정적이고 많은 것이 보장되는 비자였으므로 크게 고생을 한 기억은 없다. Paypal도 그렇고, 영미권을 기반으로 한 결제서비스의 경우에는 신용카드 인증 외에는 별도의 인증 수단을 요구하는 경우를 본 적이 많지 않다. 당장 짜증이 나서 미쳐버릴 것 같은 그녀에게 한국의 공인인증 시스템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줄 자신이 없었다. 사실 발급 받으라니 발급 받고, 등록 하라니 등록한 정보들일 뿐 그런 게 왜 필요한지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월요일에 보스 편에 핸드폰 보내주시겠어요? 제가 다 세팅 해두고, 아이들 접종도 받을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그 날은 유독 잠이 오지 않았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잦을까봐 겁도 났지만, 우리나라의 모든 시스템이 얼마나 배타적인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외국인이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법의 테두리 밖에 놓이는 일은 없으면 좋겠지만, 우리 는 언제까지고 그 사회의 주변부로 쫓겨나지 않을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할 수 있을까.
이리저리 뛰며 모든 걸 세팅해줄 수 있는 비서가 없는 누군가에겐 이 땅은 아주 냉혹한 곳일 것이다. 조그만 얼굴에 채 맞지도 않는 마스크를 억지로 한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그의 모습이 자꾸만 그려졌다.
참고로, 월요일에는 당연하게도 모든 게 해결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