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솔 Jan 27. 2023

코로나 시대의 비서 (1)

우당탕탕 그 자체였던 코로나 시대의 비서와 보스 이야기


몹쓸 전염병이 처음으로 스멀스멀 얼굴을 드러내던 시기에 자영업자인 언니랑 나눴던 대화가 생각난다. "무슨 판데믹이 3년을 가, 기껏해야 3개월 가겠지. 언론에서 오버하는거야 걱정 마". 언니가 나의 그 위풍당당한 얼굴을 기억하고있지 않기를 바란다. 민망하니까.


재미있게 하던 T/F가 회의실에 모여있으면 안된다는 무성의한 이유로 해산되었고, 의욕을 잃고 빈둥대다가 갑작스럽게 비서로 발령을 받았다. 그렇게 보스의 하관을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만 목격한 비서가 되었다.


방역 최전선에서 고생한 의료진이나 생계의 끈을 애써 붙잡아야 했던 모든 사람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코로나 시대의 비서로서 나름의 에피소드들이 있었기에 이제는 (거의) 추억이 된 일들을 주워섬겨 본다.


헌팅포차가 뭐예요? 감성주점은?


당시 우리 회사는 매일매일 임직원이 스스로의 위험도(?)를 체크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배포했다. 만약에 어제의 퇴근과 오늘의 출근 사이 내가 코로나를 걸릴 법한 (예: 클럽가서 놀기, 100명 이상 행사 참여 등) 행위를 했거나 이상 증세가 있다면 스스로 신고하고 재택근무를 해야하는 식이었다.


이 중 방문을 해서는 안되는 고위험 시설로는 유흥주점, 노래연습장, 스탠딩 공연장, 그리고 그놈의 헌팅포차 / 감성주점이 적혀 있었는데, 문제는 이 둘의 카테고리가 '음식점'으로 묶여 있었던 것이었다. 그 정도 한국어는 읽을 줄 알던 보스의 질문 폭격이 시작됐다.

(둘의 대화는 영어 90%, 한국어 10%정도로 이루어진 것을 기억에 의존해 한국어로 옮긴 것임을 미리 밝혀 둔다.)


"한대리님, 여기 음식점도 있네요? 헌...팅...헌팅? hunting? 포차?"

"포차 is 포장마차...포장....마차... you know?"

"아 알아요. 한 번 가봤어요. 그러면 헌팅포차는...hunting하는 카페 같은거예요? 그게 왜 음식점이예요?"

"아니요 이것은 사람 헌팅입니다...죽이는건 아니구요. 데이트할 사람을 고르는 거예요."

"Okay. 감성주점? 이건 뭐예요? 감성은 emotion? 아니예요? 주점? bar?"


여기에서 나의 말문은 막히고 말았다. 사실 아직도 둘의 차이점은 모르겠다.


"모두 intense한 의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술 먹고 춤추러 가는 곳이예요. 사실 차이는 잘 모르겠어요...보스 어차피 그런데 안가실거잖아요"

"어차피 저는 나이때문에, 가더라도 입구에서 가드한테 막힐걸요 크크크"


모든 게 혼란스럽던 시기, 딱히 웃을 일도 아니었지만 둘이 처음으로 무언가를 두고 낄낄 웃었다.


오늘은 이만 마감합니다


오미크론이 변이 이전에는 사내에 밀접접촉자가 발생하는 순간 그 층을 셧다운하고 모두 퇴근 시켜버리는 강력한 방역 정책이 시행되었었다. 밀접 접촉자가 언제 어디서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늘 마음이 초조했다. 일부 미팅은 온라인으로 대체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종류의 것들도 있었다.


셧다운 벨이 울리는 순간부터 나는 모든 일정을 전부 조정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보스는 그런 내 뒷통수를 바라보며 가끔 프린트된 인쇄물을 건네주거나 나를 위해 커피를 내려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늘 우리 둘이 건물에서 마지막으로 빠져나가곤 했는데, 어쩐지 그 모습이 타이타닉호의 선장과 바이올리니스트처럼 비장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전화받으세요 제발 ㅠㅠ


셧다운 같은 비상 상황이 근무 시간 중에 발생하는 날은 차라리 나은 것이었다. 어느 평일 저녁, 8시 께였던가. 회사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오늘 보스와 회의한 사람 중 확진자가 발생해서, PCR검사받으셔야 합니다."

"(심장 철렁) 지금 너무 늦었는데 내일 받으면 안 되나요?"

 "지금 바로 검사 안 받으시면 내일 우리 건물 출근 여부를 못 정해요. 검사결과 적어도 새벽 5시까지는 나와야 공지할 수 있어요. 늦게 공지하면 몇천 명이 출근했다가 집에 되돌아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연락드릴게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회사 운전기사님 대신 방역택시를 부르고, 검사 가능한 장소를 찾아 대기를 시켜 두었는데 막상 문제는 보스가 감감무소식이라는 거였다. 사내 메신저, 이메일, 전화, 와이프 전화, 카톡...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연락처를 시도해 보았지만 어느 것도 대답은 없었다. 워낙에 아이들도 있어 코로나를 조심하는 편이라 집에서 나갔을 리는 없고...


 방역택시 기사님과 회사 방역담당 직원들의 메신저가 빗발치던 찰나에 생각난 마지막 수단은 아파트 호출벨이었다. 보스는 사택에 살고 있었고, 사택에는 당직 직원이 있었다. 제발 보스 집에 호출 한 번만 넣어달라는 나의 요청에 담당 직원은 민원이 들어올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지만, 경위서를 써도 내가 쓸 테니 딱 한 번만 봐달라는 나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수화기를 들어주었고 그 너머 들린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오 죄송해요. 핸드폰이 무음이었어요."

"ㅠㅠ 지금 당장 나가셔야 해요. 밖에 까만 택시 와있는데 그거 일단 타세요!"


평소 늑장 부리는 게 습관이던 보스도 그날은 위기감을 느꼈는지 후다닥 뛰어나가, PCR 검사소가 문을 닫기 1분 전쯤 아슬아슬 도착해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새벽 네시쯤 받아 본 검사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음성이었고, 몇 천 명의 사람들은 별 탈 없이 새 출근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비서가 된 후 처음으로 다음날 지각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되어 본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